[최학림 칼럼]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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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림 논설위원

국정 농단이 일어났다. 가장 위험한 것이 "될 대로 돼라"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그랬다는 것이다. 2014년 7월 당시 유진룡 문화부 장관의 퇴출이 고비였다.

유 전 장관은 고시 패스 뒤 공직 생활을 문화공보부에서 시작한 문화부 전문 관료였다. 그의 지론은 '문화'는 '홍보'와 다르다는 것이다. 박근혜정부 출범 때 청와대 홍보수석 제의도 거절했고, DJ 대통령 시절 당시 장관의 'DJ 공보 업무 지시'를 "문화부 일이 아니다"라며 거절한 일도 있었다. 이런 것이 전문 관료의 자존감이다. 세월호 참사 뒤 그는 내각 총사퇴를 제안하고, 문화부에 떨어진 국민의식개혁 '관제' 시국강연회를 열라는 '윗선' 지침을 거부했다. 그래서 퇴출됐다.

소신 발언 장관 일거에 쫓아내
문화부는 "될 대로 돼라" 위축
대신 비선 실세 농단 시작돼

시국 서명 문화인들 '지원 배제'
우리 수준 추락시켜 버린 구태
수습 마지막 기회 제대로 하라

더 진한 내막이 있었다. '비선 실세' 최순실의 딸과 관련해 '하명'이 떨어진 승마협회 감사보고에서 최순실 딸 편을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 '참 나쁜 사람' 2명을 포함해 문화부 관료 8명이 결국 사표를 썼고, 유 전 장관은 면직돼 퇴임식도 못 열고 쫓겨났다. 소신 장관의 퇴출 이후 '토 달지 말고 받아쓰기만 하자' '소신껏 일하면 잘린다'는 풍토가 만연해졌다. 이것이 문화부에서 일어났던 구시대의 '바보 같은' 짓거리다.

보름 전, 문화계 한 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신이 지원 심의에서 배제되는 1만 명의 문화부 블랙리스트에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세월호 시국 선언에 서명한 문인 754명 이름 밑에 줄이 쳐졌다.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부산·경남 문화예술인 1290명도 '심의 배제'로 분류됐다. 연출가 이윤택이 찍혔다고 했다. 국정 감사에서 흘러나온 문화예술위 회의록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심의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지침' '지시'에 따라 심의도 하고 심사위원도 선정해야 한다는 '추한' 일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민주화 30년 이후, 국민과 나라 수준이 한순간에 우습게 되는, 가슴 찢어지고 허망한 일이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이를 두고 "샤머니즘의 정치 아래서는 만인이 불행하다"고 개탄했다.

이런 배후에 이른바 '최순실·차은택 사단'이라는 비선 실세가 있다는 것이다. 최순실과 문제의 미르 재단 설립을 주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CF 감독 차은택이 문화부를 점령했다고도 한다. 나는 이 말을 의심하고 싶다. 그러나 유 전 장관 퇴출 뒤 임명된 김종덕 문화부 장관은 그의 은사이고, 김상률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그의 외삼촌이다. 엊그제 한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두말 않고 486억 원을 낸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미르 재단 설립 취지를 "좌쪽으로 기울어진 문화계에 좌우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말했다고 한다. 소위 그 좌우 균형의 실체가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좌우 균형도 아니다. 토 달지 않고 복종하면 통과요, 소신 발언을 하면 블랙리스트다. 이건 숫제 파쇼적 발상이다. 문화부에서 "모르면 차은택에게 물어보라"는 말까지 떠돌고 있다는 것은 차마 옮기기 힘들다. 정말 그렇다면 지금 길거리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말처럼 '이건 나라도 아닌' 꼴이다.

과연 다른 분야는 어떠한가. 이 정부가 국정 과제로 내건 노동 공공 교육 금융, 4대 부문 개혁 중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은 없다. 대학 총장 하나 제대로 임명하지 못하는 곳도 몇 군데다. 부동산은 심상치 않고 가계부채는 빨간불이 들어온 지 벌써 오래되었으며, 조선·해운 산업 구조조정은 '산으로 가고 있다'. 특히 조선·해운 구조조정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결국 부산·울산·경남 지역경제를 파탄내는 쪽으로 귀결되고 있다. 한국경제의 주요 방향을 총괄 조정한다는 청와대 서별관회의는 책임자를 자처하는 이가 없고, 정책 방향성도 선명하지 않다. 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초이노믹스를 내걸었던 전 경제부총리 최경환은 경제정책의 근간을 다지기보다는 선거판 표몰이의 인기 정책을 펴다가 물러났다.

이런 어이없고 어설픈 일들의 근간에 국정 농단이 있었다는 근본적인 충격과 의심, 실망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정치권은 분노하는 민심에 정말 제대로 대응해야 한다. 최순실 특검, 총리와 비서실장의 사퇴, 우병우·안종범 청와대 수석에 대한 인적 쇄신, 그리고 거국 내각을 거론하며 중지를 모으고 있는데 참으로 이번에는 시늉만으로 그쳐선 안 된다. 성난 민심이 기다려 줄 거라고 착각하지 마라.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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