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잊은 군주' 옛날과 똑같은 오늘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매천 황현 선생 영정. 동학 농민들이 2차 봉기한 전북 완주군 삼례 봉기 역사광장에 세워진 쇠스랑을 든 농민의 팔뚝을 형상화한 조형물. 총을 둘러멘 농민군과 말에 탄 농민군 지휘관의 모습을 일본 니로쿠신보(二六新報)가 삽화로 그렸다(왼쪽부터). 역사비평사 제공

조선이 망해 가던 구한말 역사는 슬프다. 왕명의 지엄함은 사라진 지 오래고 세도 정치의 폐단이 극에 달한다.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탐관오리들은 본전의 몇 곱절에 이르는 이문을 남기려 백성의 고혈을 짜낸다. 가혹한 세금을 감당하지 못한 백성은 노비와 도적의 갈림길에 선다.

조선을 떠받친 성리학의 가르침을 권력 상층부가 어기면서 조선은 무너졌다. 백성을 근본으로 생각하며 스스로 삼가는 성리학을 삶의 지침으로 삼던 선비들은 시류에 따라 권력에 아부하며 세도가의 수족, 혹은 탐관오리의 길로 나아가거나, 스스로 세상 뒤로 물러나 칩거하는 길 가운데서 하나를 골라야 했다.

황현 '오하기문' 번역
궁중 드나들며 '국정 농단'
명성황후와 무당 진령군
'최순실 게이트' 겹쳐져


매천 황현은 후자의 길을 택했다. 1860년부터 1907년까지 조선이 겪은 일을 기록한 <오하기문>은 훗날 그의 대표작인 <매천야록>의 근간이 되는 저술이다. 관직을 마다하고 전남 구례에서 손수 농사를 지으며 <오하기문>을 펴낸다. 매천은 1910년 8월 경술국치 직후 "내가 꼭 죽어야 할 이유가 있어 죽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강한 자가 약자를 삼키는 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것이 그저 서러울 따름"이라고 쓴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

지난 이명박 정권 때 민간인 사찰 피해자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가 1994년 번역, 출간한 초판을 다듬고 풍부한 해설을 덧붙였다.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라는 한글 제목을 단 것처럼, 한글세대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게 매천이 짧게 인용한 고사의 맥락을 두루 살펴보며 이해할 수 있도록 거의 새로 펴낸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달 출간됐지만 한 달여 지난 최근 뜻하지 않게 다시 이 책이 거론되고 있다.

"임오년 변란(임오군란) 당시 왕비(명성황후)는 충주에 머물며 요사스러운 한 무당과 자주 왕래했다. 왕비는 무당에게 홀딱 반해 그녀를 서울로 불러들여 북묘에 살게 하면서 기도를 주관하게 했다. 왕비는 그 무당을 언니라고 불렀으며, 때에 따라서는 진령군(眞靈君) 또는 북관부인으로 부르기도 했다. 무당은 궁중 출입 1년밖에 안 되었지만 날이 갈수록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윤영식 조병식 이용직 등이 그 무당과 의형제를 맺고 누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그의 도움으로 관찰사 자리를 꿰찼다. 정조 이후 순조 비인 순원왕후(안동 김씨), 익종 비인 신정왕후(풍양 조씨)가 어린 왕 뒤에서 수렴청정하는 것을 지켜본 왕비는 내심 이를 선망하며 세자를 위한 치성 드리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매천은 기록했다. 

또 다른 구절에는 "신령과 부처에게 기도와 제사를 올리는 일이 창성했다. 신령과 부처에게 올릴 향과 예물을 가지고 날마다 전국 명산을 찾아다녔고, 무당과 방술을 부리는 자들은 대궐을 들락거리며 함부로 권력을 농단했다. 이렇게 대궐에 드나드는 이들은 돈이나 재물을 받고 벼슬을 시켜 주거나 죄인의 죄를 경감해 줬고, 거리낌 없이 뇌물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탄식하며 울분을 터뜨렸다."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신돈과 라스푸틴이 거론되었지만, 멀리 갈 것도 없었다. 흉년과 역병이 겹쳐 피죽으로 연명하기도 버거운 백성들의 고혈이 무속인들 손아귀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뿐 아니다. 왕권과 나라의 기강을 세우려 한 대원군의 뜻은 명분이 있었으나 나라의 형편을 감안하지 않은 무리한 대형 토건사업이었다. 세도정치 이후 고종대에 이르러 돈으로 관직을 사들인 자들이 지방 수령이나 아전으로 가 무고한 백성들에게 정해진 세율의 3배 이상을 짜냈다. '본전' 이상이었다.

<오하기문> 전체 분량 가운데 1860~1895년 전반부를 한글로 번역한 이 책은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객관적 통사로도 불리는 책이다. 성리학자로서 동학이 도탄의 백성을 홀린 점에서 서학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보수적 시각을 갖고 있지만, 동학혁명이 발생한 원인과 시대적 배경에 대한 분석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120년 뒤 우리 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지식인의 역할을 다시 묻는다. 번역자 김종익 씨는 1994년 이 책을 처음 직역에 가깝게 번역해 내면서 보지 못한 것을 이번 개역판을 준비하며 본 것 같다. 책머리에 그는 이렇게 썼다.

"권력의 농단으로 부패의 극한까지 내달렸던 그 시대 몇몇 인물의 이름을, 권력을 사익 확대의 도구쯤으로 여기는 오늘날 부패한 고위 관료들의 이름으로 환치하면, 120여 년 전 역사가 현실 정치와 하등 다를 바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당대 지식인의 탄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과거'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와 기아에 내몰린 인민의 비명이 사회적 실천인 혁명으로 전화했지만 반역의 죄명으로 처단되고, 도리어 외세에 국권을 빼앗기는 망국의 설움까지 가져다준 역사가 거울이 되어 한반도의 미래에 작은 기여를 하길 감히 바란다." 매천 황현 지음/김종익 옮김/역사비평사/672쪽/2만 8000원.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