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원의 영화와 삶] 밥 딜런, 그에 관한 두 편의 영화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토드 헤인즈 감독의 '아임 낫 데어' 중 한 장면.

"당신은 가수입니까, 시인입니까?" 1965년 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나온 질문에 밥 딜런은 이렇게 대답한다. "전 그냥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인데요." 밥 딜런의 경력 초기를 다룬 마틴 스코세이지의 다큐멘터리 '노 디렉션 홈:밥 딜런'(2005)에 나오는 장면이다. 1960년대 밥 딜런은 뮤지션이라는 자신의 직업에 다른 꼬리표를 덧붙이려는 사회적 요구에 신물을 내고 있었다. 지칠 정도로 끊임없이 정치적 입장 표명을 요구한 언론과 벌인 설전은 이미 유명하다. 설전이라곤 하지만 그 대부분은 기대에 어긋나는 단답형 대답으로 상대를 허무하게 무너뜨리는 식이었다. 이를테면 오늘 있을 베트남 반전 시위에 참가할 거냐는 질문에 "오늘 밤 바빠요"라고 답하고, 당신은 저항가수가 아니냐는 말에 "누가 그래요?"라고 반문한다.

2000년대 밥 딜런은 당시 "세대의 대변자니 시대의 양심이니 하는 말로 나를 포장하려는 시도"에 재차 반감을 표하면서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 잘라 말했다. 하지만 그도 사회에 그런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했던 것 같다. "만약 내가 밥 딜런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밥 딜런 같은 사람이 내게 해답을 줄 수 있겠거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라는 묘한 말도 남겼다. 하여간 내게 이 일화들은 어느 우상화된 인물을 둘러싼 대중적 환상과 실제 간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존재의 매력과 특별함을 예증하는 것으로 읽힌다.

스코세이지 감독 '노 디렉션 홈'서
음악 외 꼬리표 붙이기에 신물

'아임 낫 데어'선 다중자아 등장
모두이자 아무도 아닌 존재

그가 누군지 말해 줄 이 누군가
단지 뮤지션 딜런을 사랑할 뿐


10월 13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밥 딜런의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깜짝 놀란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겠지만 터무니없다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 같다. 실은 그 다음이 더 재밌다. 세상은 이 수상결과에 떠들썩했지만 정작 그는 완벽한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참다못한 노벨상 위원회의 노작가는 "무례하고 오만하다"며 그를 비난했고 이에 화들짝 놀란 한림원 측은 "설령 시상식에 오지 않아도 수상의 모든 명예는 오로지 그의 것"이라며 자세를 굽혔다. 아마 한림원의 그 노작가가 '노 디렉션 홈'을 봤더라면 최소한 그런 실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부분의 일화는 그 영화에서 가져왔는데, 하긴 러닝타임 3시간 38분에 이르는 영화를 다 보아도 밥 딜런이 어떤 인물인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의 침묵이 밥 딜런다운 것이라는 점은 알 수 있다. 그에게 '음유시인'이라는 호칭을 안기고 그의 노랫말을 '귀로 듣는 시'로 평가하여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기로 한 한림원의 결정이 예외적이라면, 그건 수상의 감격과 열광이 작가 자신보다 청중에게서 나온다는 점이 아닐까. 한때 딜런의 연인이었던 존 바에즈가 그를 '복잡한 사람' '알면 알수록 모를 사람'이라 한 것이 하나도 놀랍지 않다.

또 한 편의 영화. '아임 낫 데어'(2007)에서 토드 헤인즈는 정확히 그 점에 착안하여 전대미문의 탁월한 전기 영화 한 편을 만들어냈다. 밥 딜런의 7개의 서로 다른 자아를 인종과 성별이 다른 6명의 배우가 연기했는데 이 영화 역시 다 보아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게 핵심이다. 여기서 그는 포크가수, 시인, 혁명가, 무법자, 영화배우, 록스타로 등장하지만 그중 누구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 모두이다. 영화 제목대로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거기에 없다.

12월 10일 있을 노벨상 시상식에 그의 참석여부를 점치며 두 편의 영화를 다시 꺼내 보니 이 상이 그를 다른 자리로 데려다 놓진 않으리라는 건 알겠다. 그리고 새삼 깨달은 단순한 사실 하나. 밥 딜런이 '가수 그 이상'이어서 피곤했던 사람은 밥 딜런뿐이고, 우리는 그가 있어 즐거웠다.


강소원


영화평론가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