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귀촌일기] 16. 바람길, 물길, 사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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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도 제 길이 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바람이 다니는 길에 마을을 만들지 않았다. 특정지역에 발생하는 바람이 국지풍(局地風)이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 골짜기와 산 정상 사이에 부는 국지풍을 각각 해륙풍, 산곡풍으로 부른다.

제 길이 있기는 물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밝힌 저서가 조선 영조 때 신경준이 편찬한 <산경표>다. 이 저서에서 키워드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는 한 문장에 한반도의 인문지리학이 담겨 있다. 물과 산이 각자의 길을 가는 곳에 마을이 생긴다.

이번 태풍 '차바'를 보며 바람과 물의 길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수십 년 만의 재앙이라고 과장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람과 물은 늘 다니던 길을 다닌 것 뿐이다.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바꾼 게 문제다.

이번 태풍에 법기수원지 제방 아래 히말라야시더 다섯 그루가 쓰러졌다. 수령 130년이 넘는, 법기수원지에서 최고 큰 나무였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법기수원지는 바람을 감안하여 설계된 흙댐이다. 법기천 골짜기를 따라 산곡풍이 몰아치면 흙댐이 위험하다. 그래서 댐 높이로 방풍림을 조성한 것이 히말라야시더이다. 관리사무소 측은 나무가 쓰러질 때마다 베어 내는 조치만 하고 있다. 나무들을 서로 연결하고 가지치기를 해서 바람을 견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해운대구 마린시티에 몰아친 바람은 파도를 몰고 해안 방파제를 넘어와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마린시티는 30년 전만 해도 바다 한가운데였다. 88올림픽 요트 경기장 건설을 위해 바다를 메워 만든 인공의 육지다. 바다 한가운데 파도가 치는데 바닷물이 범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뿐인가. 수영강 강물 대량 유입, 해수면 만조, 해륙풍 최고조라는 3박자가 동시에 떨어질 경우 가공할 만한 재해가 일어나는 것이다.

바람과 물이 다니는 길을 막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2003년 태풍 매미로 부산항 신감만 부두의 갠트리크레인 6기가 붕괴된 사건이 보여 주었다. 마린시티와 같은 매립지다. 13년 만인 지난달 책임소재를 가리는 소송이 끝났지만 순간풍속이 한계치인 초속 50m를 넘었는지는 끝내 밝히지 못했다.

저녁이 되면 법기수원지에 머물던 철새들이 동남쪽 하늘로 떼를 지어 사라진다. 어제와 다른 새들이지만 날아가는 길은 어제와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철새들이 가는 길이 있는 것이다. 그 길은 비행하기 좋게 상승기류와 일치할 것이다. 새도 물도 바람도 길이 있건만 사람만은 있던 길을 바꿔 놓고는 자연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논설위원 ye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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