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달콤쌉싸름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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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세상을 떠난 고 옥태권 소설가의 별명은 '마린 보이'였다. 1961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한 그는 몇 년간 상선을 타고 세계의 바다를 누볐다. 그는 자신을 '혈관 속까지 바닷물이 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첫 소설집 <항해를 꿈꾸다>는 그래서, 당연하게도, 바다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선장과 선원과 공무감독과 선원의 아내, 그리고 심지어 선박용 기계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94년의 등단작 <항해는 시작되고> 역시 이런 글귀로 시작된다. "배라는 것은 가라앉을 때까지는 떠다니는 것이며, 또한 배라는 것은 건조될 때부터 가라앉을 운명이다." 인간의 삶과 배의 운명이 중첩되는 구절이다.

'가라앉을 때까지 떠다니고
건조될 때부터 가라앉을'
삶과 중첩되는 배의 운명

일찍 떠난 '마린 보이' 소설가
작품으로 본 달콤쌉싸름했던 삶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항해는 그에게 지루하고 서럽고 고독한 여정이 되었던 것 같다. 첫 소설집의 '작가의 말'에서 그는 "미치지 않기 위해 글을 썼다"고 고백한다. 망망대해의 바다 위에서 그가 느낀 그 미칠듯한 우울감과 고독을, 그러나 생전의 그에게서는 좀체 감지할 수 없었다. 항상 재기발랄하고 다변이며 유쾌한 그는 자타 공인 만물박사이자 백과사전이었고, 박학다식의 대명사였다. 금속성이 약간 섞인 낮고 빠른 목소리로 조곤조곤, 어떤 화제든 막힘없이 설명하고 분석하고 논평했다.

<항해를 꿈꾸다> 이후 '바다 사나이'로서의 의무와 숙명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던 것일까. 아니면 "배란 아니 삶이란 원래 사소하고 쪼잔한 것들의 총합"이라는 작중인물의 생각에 동조했던 것일까. 소설집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이야기>에 이르면 더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삶의 세목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아르바이트하는 젊은 여성, 회사원 가장, 분식집 주인, 택시 기사, 잡지사 기자 등의 일상이 작가의 활달한 입담과 필치로 묘파된다.

지난주 그의 빈소에서는 선후배 소설가들 사이에서 다양한 추억담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생전의 그라면 누군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장 부연 설명하거나 해설할 내용이었다. "환갑 되면 문인들 사진전 열겠다더니, 지가 먼저…." 그러고 보니 주변 문인들은 너나없이 자주 그의 카메라에 얼굴이 찍히곤 했다. 한 문우는 그에게서 받은 커피 선물세트를, 다른 문우는 며칠 전까지도 병실에서 농담을 즐기려 했던 그의 마지막 모습을 되새겼다.

"은유가 아니라 진짜로?" 오래전 내가 들었던 첫마디는 이랬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다가 얼마 전 귀국했다는 내 얘기를 들은 후 그가 던진 말이었다. 부산소설가협회가 주관한 '소설학당'에서 그는 내가 속한 소그룹의 담임이었다. 그때 첫 과제로 제출한 단편소설이 이듬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 후로도 나는 그를 친절하고 속 깊은 담임처럼 대할 수 있었다.

죽음은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말한 건 스티브 잡스였다. 잡스는 매일 아침 "만약 오늘 내가 죽는다면, 나는 과연 오늘 하려고 하는 일을 하겠느냐"라고 스스로 묻는다고 했다. 하지만 천재가 아니라 범속한 필부들인 우리는, 오늘 세상을 떠난다면 후회할 만한 일들을 지금 이 순간에도 행하고 말하면서 살아간다. 바다와 육지에서 아낌없이 울고 웃으며 후회하고 사랑한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그가 남긴 다음 글은 초콜릿이 아니라 인생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일 것이다.

"입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는 초콜릿은, 초콜릿이 아니다. 그대 마음의 입으로 베어 문 한 조각, 쌉싸름한 맛에 움찔하다가도 점점 달콤하게 저며 오는 색색의 맛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황은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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