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추한 삶, 예술로 피워 올린 은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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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지화 '복숭아밭에서 노는 가족'.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대향(大鄕) 이중섭(1916~1956)은 한국전쟁 시기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하며 창작 활동에 큰 어려움을 맞게 된다. 전쟁통에 그림을 그릴 재료를 제대로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중섭은 역시 '천재 화가'였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기법을 창안해 새로운 장르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바로 '은지화(銀紙畵)'다. 부산이 은지화의 '고향'인 셈이다.

이중섭, 백년의 신화 부산전
20일부터 부산시립미술관
예술혼 집약된 40여 점 전시

아이·가족·부부 등 소재
담배 은박지 작품 천재성 번뜩
그리움 담은 편지화도 애틋


은지화의 제작 방식은 이렇다. 양담뱃갑 속의 은박지가 재료다. 은박지를 반듯하게 편 다음 끝이 날카로운 철필(鐵筆)로 종이가 뚫어지지 않을 만큼 윤곽선을 그린다.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면 긁힌 부분에만 물감자국이 남게 된다. 그렇게 해서 깊이 파인 선으로 일종의 '드로잉(Drawing)'이 완성된다.

편지화 '1953년경 아들 태성에게 보낸 편지'.
이중섭의 은지화는 매우 매력적인 작품이다. 평면이면서도 층위가 생길 뿐 아니라 반짝이는 표면 효과도 특징적이다.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나 금속공예 은입사 기법을 연상시킨다.

이중섭은 피란 시절부터 상당히 오랜 기간 은지화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 수가 약 300점에 이른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다. 20일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시작되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 부산전(본보 9월 29일 자 30면 보도)에는 그의 '예술혼'이 집약된 은지화 40여 점이 전시된다. 작은 은지화를 고해상도의 기가픽셀로 촬영해 16m의 벽면에 영상으로 구현하기도 했다.
전시되는 은지화는 작은 '아이'와 '가족', '부부'를 다룬 작품이 대부분. 작품 속 아이는 이중섭의 두 아들(태현·태성)을 모델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 작가가 아내, 아들과 헤어져 언제나 그들을 그리워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복숭아 밭에서 노는 가족'은 전쟁의 고단함에서 벗어나고픈 작가의 소망을 담은 듯 부모와 아이들이 복숭아를 따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 '게와 가족'과 '가족에 둘러싸여 있는 아이들'도 현실의 어려움을 잊으려는 듯 아이들을 중심으로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중섭의 가족에 대한 끊임없는 그리움은 '편지화'에서도 확인된다. 이중섭은 1953년 7월께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다. 그 후 여러 곳을 정처 없이 떠돌며 가족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다. 가족 상봉의 날이 곧 올 것이란 기대와 염원, 아들에 대한 염려가 담겨 있다.

자유분방한 필체와 즉흥적인 그림이 어우러져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부산 전시에서 선보인다.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내년 2월 26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 입장료 성인 7000원, 유아·초·중·고 4000원. 051-731-7128.

박진홍 선임기자 jhp@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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