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검은 옷'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검정이라는 색은 '죽음'이나 '절망'을 상징한다. 온종일 햇살이 들지 않은 북향이요, 한 계절 햇살이 시드는 겨울이다. 이러니 달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을 좋아하는 이는 양상군자(梁上君子)뿐이리라.

검정이 가지는 이런 이미지는 시대의 암울을 애도하며 불의에 저항하는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더할 수 없는 비탄을 부르는 죽음에 대한 슬픔이 그 어떤 항거보다 강한 죽음의 투쟁으로 승화된다는 암시이다.

국내에서도 검은 옷을 입고 이의를 제기하는 집단 행위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몇 년 전 어느 방송국의 뉴스 앵커는 공정방송 수호를 다짐하며 검은 옷을 입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블랙 투쟁'을 벌였다. 대구의 한 고교에선 졸업생들이 스승의 부당해고에 항의하는 표시로 검은 양복을 입고 졸업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장면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올해 들어서만도 이런 일이 몇 번 발생했으니 말이다. 색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세계적이다. 올 5월부터 캄보디아에서 '블랙 먼데이(Black Monday)'시위가 벌어졌다. 시민단체들이 인권운동가 5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매주 월요일 검은 옷을 입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 시위가 20주 가까이 이어지자 경찰이 월요일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면 누구나 체포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는 사흘 전 수만 명이 항의 집회를 가졌다. 시위대는 '생식권(reproductive rights)'에 대한 애도의 의미로 검은 옷을 입었으며 이날을 '검은 월요일'이라 불렀다. 참가자들은 '나의 자궁은 나의 선택' 같은 구호를 외치며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모든 억압을 거부한다는 단호한 의지를 내보였다.

이 항의 시위의 발단은 집권 극우 정당의 낙태 전면 금지법 추진. 극단적으로 성폭행 피해자도 낙태하면 처벌한다는 이 법에 여성들이 발끈하고 일어선 것이다. 여성의 몸을 국가발전을 위한 도구나, 관습의 희생물로 만드는 데 대한 거부의 몸짓이었다.

이 단계에서 검정이 가지는 긍정의 세계가 열린다. 고귀와 위엄, 영원과 신비의 뜻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머리카락은 까매야 건강하고, 언 손을 녹이는 숯도 까매야 좋은 법이다. 이 저항이 영글어 또 하나의 '컬러혁명(Color Revolution)'이 도래하길. 이준영 논설위원 gapi@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