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반기문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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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현 정치부장

유엔 사무총장직은 원래 반기문의 자리가 아니었다.

2003년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12월 주미대사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기용했다. 진보 정권과 보수언론 대표의 결합으로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던 인사의 이면에는 유엔 사무총장을 그려왔던 홍 회장의 꿈도 작용했다. 노 대통령은 홍 회장을 주미대사로 발탁하면서 아시아몫으로 2007년 1월 새 임기를 시작하는 유엔 사무총장직 진출을 적극 지원키로 암묵적으로 약속했다.

유엔사무총장은 본래 홍석현 몫
運七技三, 공직 내내 운 따라
특유 성실함이 승승장구 밑바탕

대통령 욕심은 전혀 다른 차원
아마추어 대권행보 벌써 눈살
'TK+충청+친박'으론 성공 못 해


하지만 홍 회장은 취임 불과 7개월 만에 낙마했다. 2005년 7월 홍 회장이 1997년 대통령 선거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이른바 '안기부 X파일' 사건이 터진 것이다. 홍 회장은 옷을 벗어야 했고 이때 대타로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나선 것이 바로 반기문 당시 외교부 장관이었다.

유엔 사무총장에 이르기까지 반기문의 과거는 더욱 드라마틱하다. 참여정부 첫 외교보좌관(2003년)과 두 번째 외교부장관(2004년)으로 승승장구 하는 과정에 절묘하게 운이 따랐다. 참여정부 출범 때만 해도 평범한 외교관이었던 그는 당시 실세였던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과 얽힌 인연으로 외교보좌관에 임명된다. 2004년에는 이라크 파병문제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와 외교부가 충돌하면서 윤영관 외교부 장관이 경질돼 외교부 장관에 이른다. 이어 홍석현마저 낙마하면서 유엔 사무총장에 이르는, 그야말로 출세의 문이 저절로 열리는 길을 밟아 온 것이다.

이런 그를 두고 관가에서는 '운칠기삼(運七技三)'으로 표현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런 운도 공직생활 내내 보여 준 특유의 성실함에서 비롯됐다는 평가가 많다. 참여정부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반기문 외교부 장관과 호흡을 맞췄던 오거돈 동명대 총장의 회고다. "아이고, 그 사람 성실함은 누구도 못 따라갑니다. 동원호 피랍사건이 터졌을 때 일입니다. 당시 비상대기 상황이라 새벽 4시까지 연락을 주고받다 '반 장관, 이제 들어가서 눈 좀 붙이고 나옵시다' 했더니 '장관님 먼저 들어가십시오. 저는 좀 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더라고. 내가 속으로 '이 사람은 잠도 안 자나' 했지."

그렇게 성실함을 갖춘 속에 운마저 따라 준 반기문은 이제 대통령을 꿈꾸고 있다.

대통령 한번 배출해 보는 게 소원인 충청도 출신인 데다 정권 재창출이 지상과제인 여권 주류 친박(박근혜)계까지 전폭 지지에 나설 태세니 이번에도 운이 기막히게 따라 주는 셈이다.

하지만 성공한 외교관 반기문이 대통령 반기문이 되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가 떠나 있던 10년간 우리 사회에 발생한 다양한 갈등과 조정과정에서 그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비록 이념과 정파는 달라도 국민들의 삶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이 여러 번의 좌절을 거치면서 결국 대권에 이르렀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대권을 향한 아마추어 행보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지난 5월 마지막 한국 방문에서 친박계 인사들과 함께 세를 과시하듯 경북 안동을 방문하더니 이어 느닷없이 JP(김종필)를 찾아가 넙죽 인사를 올리는 모습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이른바 'TK(대구·경북)+충청'의 지역기반에다 친박을 묶는다는 정치공학적인 셈법을 여과없이 드러내 놓고는 "언론이 과대해석한다"고 한발을 빼는 모습도 어설픈 정치인 흉내내기로 비쳐져 더욱 그렇다.

그에게 대권 꽃가마를 태우겠다는 새누리당 주류세력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보수정권 10년을 운영해 온 이들이 변변한 차기 주자 하나 양성하지 못한 채 '반기문바라기'만 하고 있으니 정권 재창출의 길이 요원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참여정부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출마를 적극 지원하자 "철부지들의 턱도 없는 짓"이라고 맹비난했던 새누리당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 처지가 참 옹색하다.

내년 12월 반기문이 어떤 자리에 있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현 시점에서 아무 의미 없는 여론조사 1위 착시현상에다, 대선의 최대 승부처 수도권과 PK(부산·울산·경남) 민심을 자극할 수 있는 TK+충청연대론, 여기다 지난 총선에서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다름없는 친박계의 꽃가마를 타겠다는 발상만으로 대권을 생각한다면 그 첫발은 아예 떼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10년 세계 대통령' 이미지가 진흙탕 정치권에서 만신창이가 되도록 내버려 두기엔 그동안 소중하게 키워 온 '국민 자산' 반기문이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jhno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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