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창의 고전 다시 읽기] 38. 장준하 <돌베개>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역사 바로 세우지 못한 사회는 사상누각

장준하 선생의 <돌베개>는 망각의 역사를, 나태와 방관으로 찌든 우리의 영혼을 가차 없이 흔들어 깨운다. 사진은 고 장준하 선생 겨레장 발인제에서 유족들이 제사를 지내는 모습. 부산일보DB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겨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조국의 역사 속에 핏빛으로." 죽음을 각오한 처연한 심경을 담은 이 시구는 스물여섯 나이의 장준하가 광복을 목전에 두고 미국전략첩보대 대원으로 국내에 잠입하기 전, 국내의 부모와 아내 앞으로 유서와 함께 보낸 것이다. <돌베개>(1971)는 이때 같이 동봉했던 일곱 권의 일기장을 바탕으로 쓴 항일 역정의 준엄한 기록이다.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1944년 7월 7일 일본군 부대 탈출, 6000리 길을 걸어 충칭의 임시정부에 도착, 광복 후 귀국하기까지 2년여 형극의 과정이었다.

중국 쉬저우의 일본군 부대에 배속된 장준하는 동료 몇 명과 더불어 철조망을 뛰어넘는다. 맹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가파른 석산도 기어오르고 끝없는 평원을 걷고 또 걸어야 했던 필사의 탈출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불로하 강변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동북쪽의 조국을 향해 경건하게 머리를 숙인다. 고향 땅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 산천초목의 바람소리. 흐르다 머물러주는 포플러 끝의 구름. 불타는 하늘에 산이 덮여 불빛이 번지듯이 붉은 고향의 노을." 생사를 넘나드는 처절한 상황에서도 서정성을 잃지 않는 호쾌한 정신.

日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6000리 걸어 필사의 탈출
항일 역정의 준엄한 기록

선생의 피끓는 나라사랑
나태·망각에 찌든 후대
가차 없이 흔들어 깨워


린촨에 도착한 장준하 일행은 탈출 학병들로 구성된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찾아간다. 감격의 만남이었다. 중국군과는 달리, 본격적인 훈련을 받지 못할 형편이라 잡지 '등불'이나마 발간하여 용기를 북돋운다. 잘라낸 속옷과 종이를 겹쳐 실로 누빈 것이 겉표지였다. 그렇게 두 권을 만들어 80명이 돌려가면서 보고 또 보았다. 그러나 총도 없는 훈련병 신세에 마냥 머물 수는 없었다. 또다시 일본군 점령구역을 지나 충칭으로 가야 했다. 동행한 여성들이 행렬 바로 옆에서 용변을 보아야만 하는 그런 급박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충칭에 도착. 임시정부 건물은 초라하기만 했다. 김구가 환영사를 하고 장준하가 답사를 한 환영회는 통곡의 바다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장준하가 본 임시정부는 분열과 파쟁 그 자체였다. 참다못한 장준하가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가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항공대에 자원하여 제일 먼저 임정 청사부터 폭파하겠노라고 폭탄선언을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동의 적 앞에서의 분열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비통한 심경으로 임정을 떠난 장준하 일행은 시안으로 간다. 광복군 제2지대에 합류한 일행은 미국의 전략첩보대에 소속되어 국내 잠입을 위한 특수 훈련을 받는다. 그 와중에서도 '제단'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치열한 기록정신. 그러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애통하게도 침투작전은 무위에 그친다. 미국으로부터 그나마 대접받을 일말의 기회마저 놓친 것이다. 11월 23일에야 귀국하는 김구와 장준하 일행. 임시정부 요인들은 국무위원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다. 미군정은 풍찬노숙 역전의 용사들을 냉담하게 맞이했던 것이다.

이후 우리 사회는 주지하다시피 일제 앞잡이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가 월간 <사상계>를 발행하는 등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며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를 온몸으로 돌파해나갔던 과정은 또 다른 고난의 장정이었다. 한때 <사상계>가 수만 부씩 팔리기도 했지만, 그는 가족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그의 5남매 자녀들은 학비 때문에 진학은 엄두도 못 내고 모두 고졸에 머물러야 했다. 큰아들 장호권 씨는 현재 국내에 들어오지도 못한 채 미국 땅을 떠돌고 있다.

공자는 말한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수치지만,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부유하고 귀한 게 오히려 부끄러움이다." 다시 소로의 말을 빌리자면, "불의의 사회에서 정직하게 살면서 또한 외적으로 안락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 바로 세우기에 실패한 사회는 경제도 문화도 사상누각일 뿐이라는 말이다.

분노의 인간, 역사의 인간 장준하의 사자후는 망각의 역사를, 나태와 방관으로 찌든 우리의 영혼을 가차 없이 흔들어 깨운다. 그의 6000리 장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친일 역사의 청산과 극복, 그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엄중한 과제다. -끝-

jhc55@deu.ac.kr 


장희창


동의대 교수(독문학)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