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동네 사람들아, 내 말 좀 들어보소!
/김성언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삼봉 정도전은 조선왕조 창업의 실질적 기획자였다. 고려 잔당들이 설치는 개경을 벗어나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며 천도를 계획하고서 옛 양주 고을을 둘러본 후 '바로 여기다!'고 탄성을 발한 곳이 지금 경복궁 터다. 북악을 등지고 남산 너머로 한강을 멀리 내다보는 제경(帝京)의 지세인 데다 우백호의 인왕산과 좌청룡의 낙산이 양팔로 굳세게 에워싼 형국이라 천시(天時)에 호응해 지리(地利)가 이 이상 가는 곳이 없다고 본 것이다. 한데 일제 때 청룡의 목을 잘라 미아리로 넘어가는 신작로를 내는 바람에 낙산 아래는 지기가 끊겨 가난뱅이의 소굴이 되어버렸다는 믿거나 말거나 풍수담이 전하는데, 동대문 넘어가는 동숭동과 창신동이 그곳이다.
하숙집 주인 아지매의 넋두리
호머의 장대한 서사시 떠올려
시대의 소명에 충실한 대시인
한나라 사마천을 본받아 경세제민의 포부를 담은 불후의 명문을 써서 천하의 재사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웅대한 뜻을 품고 유학길에 오른 첫날, 철학과 선배를 따라 낙산 꼭대기 박오복 씨의 부인이 경영하는 하숙집에 이불 보따리를 푼 순간부터 내 청운의 사방지(四方志)는 흑운의 악몽으로 바뀌었다. 밤마다 연탄 불구멍을 꽉꽉 틀어막는 아지매 몰래 불쌍한 연탄을 위해 병아리 고추만큼 불구멍을 개방하는 일도 힘들거니와 십년 전 신문으로 도배한 바닥으로 일산화탄소가 새어 나와 비명횡사할까 잠 못 이룬 밤이 무릇 기하(幾何)였던가. 그러나 가장 날 괴롭힌 것은 저녁마다 어김없이 벌어지는 구라파대전이었다.
전남 함평에서 상경해 대목(大木) 일에 종사했던 오복 씨는 정신이 멀쩡할 때면 천하일민(逸民) 요순 백성인데 일단 한 꼽뿌 들어가셨다 하면 세상 둘도 없는 개망나니로 돌변해 집안 집기를 마구 파손할 뿐 아니라 요조숙녀 정막례 씨를 복날 개 잡듯 두들겨 패니, 합판 한 장 너머에 기거하는 자로서는 악에 받친 중년 남녀가 맞지르는 고함과 악다구니를 견뎌 낼 재간이 없었다. 전투의 대단원은 으레 작전상 후퇴를 감행한 막례 씨가 대문밖에 퍼질러 앉아 온 동네를 향해 발하는 고래고함으로 획을 그었다가 결국 대반전을 이룩하고 막을 내렸으니 히틀러의 침공에 대항한 노르망디 상륙과 도조의 야욕을 꺾은 미드웨이 전투에 견줄 만하다.
"동네 사람들아! 내 말 좀 들어봐라! 이 화상이 사람 잡는다!"로 시작되는 아지매의 넋두리는 결혼 초야부터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장 삼십 년을 아우르는 세월 동안 아저씨가 저지른 온갖 비리와 악행이 나열되는데 호머 이후 세상에 이런 장대한 서사시가 없다. 4·4조로 엮어 내리는 사연의 줄거리가 어찌나 기구하고 절절한지 국문과 후배가 그 사설을 그대로 시로 써서 대학문학상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덧붙이랴. 팔을 내두르며 연출하는 너름새는 정히 가관(可觀)이요, 진양조로 목청껏 내리 읊는 창은 진실로 가청(可聽)이라, 저녁 무렵 보리밥 소찬을 잡숫고 나와 야경 구경하던 동네 어른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드니 그래도 장유유서에 충직한 오복 씨가 어찌 슬그머니 꽁무니를 사리지 않았으랴.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사설의 첫머리는 분명 한시의 '그대 똑똑히 좀 보라!(君不見)'이나 규방가사의 '말하기도 싫다마는 이 내 말씀 들어보소'라든가 혹은 불경의 '여시아문(如是我聞)', 아니면 성경의 '예수께서 가라사대'와 궤를 같이하는 진리의 발화(發話)임에 틀림없다. 원시로부터 이어온 연면한 폭력을 거부하고 문명인답게 살기 위해 천하인민을 향해 부르짖는 소통의 선언이자 역사적 사례로 교훈을 삼는 감계의 대문장이라 할 것이다. 주자가 언명했듯, 사람의 어쩔 수 없는 격정이 밖으로 쏟아진 것이 말이요, 그 말에 리듬과 박자가 붙은 것이 시이자 음악이다. 이치가 그러하니 정막례 여사는 시대의 소명에 충실한 휴머니스트의 삶을 실천한 대시인이라 추앙해 마땅할 것이다. 어디 시인이 별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