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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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라이프부 부장

지난여름은 참 징하게도 덥더니만 창밖으로 가을이 슬그머니 들어왔다. 더위가 한창이던 지난달 중순 동네 목욕탕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목욕탕 문은 열려 있었지만 입구에는 폐업을 알리는 글이 붙어 있었다. '42년 동안 저희 광민탕을 이용해 주신 고객님 감사합니다.'부산 수영구 광안동 122번지, 입욕료 2000원이었던 광민탕은 7월 27일에 문을 닫았다.

광민탕 여탕에서는 사진작가 손대광 씨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들여다볼 엄두도 못 하던 금남의 공간에 발을 들였다. 옷장 위에는 찾아가지 않은 목욕 바구니도 그대로다. 여탕에 전시된 사진 모두가 알몸의 남성들이니 전시회 제목처럼 '하드코어낭만전'이다.

수십 년 된 동네 목욕탕 폐업 소식
그곳에서 3년간 찍은 사진전 열려
바빠지면서 잃어가는 것들 아쉬움
가을은 우리의 때에 대해 성찰케 해


서로 때를 밀어주는 모습, 잠깐 잠든 목욕탕 이발사, 알몸으로 목욕탕 바닥에서 복권을 맞추어 보는 남자…. 헐벗은 남자 사진이 의외로 뭉클한 감동을 준다. 전시회에 다녀간 분들이 남긴 방명록을 펼쳐 보았다. "여자라서 남탕을 볼 일이 없었는데, 여탕이랑 똑같네." 여성들의 반응은 이랬고, 텅 빈 여탕을 본 남성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서점도, 목욕탕도, 때를 밀어주는 온정까지, 사는 게 바빠지면서 잃어가는 것도 많습니다. 세상에서 묻혀 온 때를 밀어내고, 바가지로 물을 퍼 씻어 내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조금 나이 든 사람의 반응은 대체로 이랬다.

외다리 장애인 남성이 몸에 물을 끼얹고 있는 사진 앞에 멈춰 서고 말았다. 남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일 텐데 어떻게 찍었을까. 손 작가는 전시회 전날 이분과 목욕탕 바닥에서 술을 한잔 했다고 말했다. 그의 장성한 딸도 같이 왔길래 아버지가 벗고 있는 모습이 어땠느냐고 물었단다. "뭐 어때요? 벗으면 다 똑같은데." 그이는 네 살 때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다.

손 작가는 목욕탕에서 몸의 때와 때[時]를 연결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가 광민탕에 다닌 세월은 8년, 사진을 찍기로 작정하고 목욕탕 휴일만 빼고 매일같이 출근한 것은 3년이랬다.

그는 시를 읽듯이 나지막한 소리로 느릿하게 말했다. "누구나 다 때가 있더라. 내가 하는 일은 그동안 결정적인 때마다 막히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크게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잘되는 것도 보았다. 사람의 운이란 게 있어서 그 시기가 온 어느 순간 돋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욕탕에 와서 몸을 씻고, 때를 벗기고, 정화한다. 그게 자기의 때를 기다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또한 때를 기다렸다. 목욕 손님들과 친해지는 적당한 때가 되면서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었다. 사진 작업은 짧으면 1~2년, 길면 10년씩 걸리니, 3년은 딱 적당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매일 목욕탕에서 사진 찍는 일이 3년째 되니 자신도 지치지만 카메라부터 습기 때문에 말썽이 나기 시작했다. 습(習·익숙함)에 젖으면, 정작 자기 때가 와도 잡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광민탕 주인 문연희 씨는 남편과 함께 20여 년 전에 목욕탕 운영을 이어받고 매일 한 평 자리를 지켰다. 문 씨는 "시아버지가 물려주신 이곳 문을 닫게 되어 조상님과 동네분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섭섭하지만 때가 된 것이었다. 폐업한 광민탕은 이달 중에 허물어질 예정이다. 수십 년간의 때가 쌓인 목욕탕은 뜻밖에도 갤러리로 잘 어울렸다. 사람은 만들 수 없고, 시간만이 만들 수 있는 정경이었다.

온전한 가을이 채 오기도 전에 역대급 구조조정 태풍이 바다 쪽에서 몰려들고 있다. 서늘해진 바람에 정신이 번뜩 든 추풍낙엽 신세들은 깊은 생각에 잠긴다. 지금은 때를 밀고 있을 때인가, 아니면 옷을 챙겨 목욕탕을 나갈 때인가, 그것도 아니면 목욕탕 문을 닫을 때인가….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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