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살아남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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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주 부산대 윤리교육과 교수

8월 28일 그저께 막 내린 EBS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EIDF)에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쇤더비 옙센의 '내추럴 디스오더'가 대상을 받았다. 짐작건대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에 별 어려움 없이 만장일치로 합의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근년에 내가 접한 다큐멘터리 영화 중 단연 최고의 것이었다. 며칠이 지났지만 그 감동이 남기는 여운, 그 울림과 떨림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한국에서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생모로부터 버림 받고 덴마크의 한 부부에게 입양된 야코브 윤이다. 야코브는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아마 생모로부터 버림 받은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야코브의 양부모도 처음에는 여느 신청자들처럼 귀엽고 건강한 꼬맹이 아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강보에 싸인 아가의 뒤틀린 모습에서 상황의 진실을 즉각 알아채었지만 다시 그 먼 길을 차마 되돌려보낼 수 없어서 맡아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뇌성마비에 대장암까지 극복 
덴마크 입양아 다큐에 감동 

언어·사회적 장애 너무 심해
"살 권리 있나" 자신에 질문 

상처 통해 삶 성찰 얻으려면 
당당하게 살아갈 권리 있어

오프닝 장면은 극장의 빈 객석을 향해 주인공이 외치는 멘트로 시작된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야코브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처음 만나면 본능적으로 충동을 느껴요. 빨리 도망쳐 버릴까, 아니면 죽여 버릴까. 그런데 오늘 저녁은 참 평화롭군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주인공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멘트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번은 빈 객석 앞에서가 아니었다. 25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덴마크 왕립극장에 입추의 여지 없이 들어서서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관객앞에서였다.

카메라는 야코브 자신이 극본을 쓰고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출연하는 연극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무대에 올려지는지를 밀착 추적한다. 야코브가 27살이 되던 해로부터 3년 반에 걸친 시간의 기록이다. 유색인종에 입양아인 데다, 뇌성마비의 지적, 언어적, 신체적 장애자인 야코브가 영화에서 첫 번째로 던지는 물음은 "나는 살 권리가 있는가?"였다. 그는 연극의 한 대사로서 이 물음을 제기했던 게 아니라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연극을 시작했던 것이다. 뇌성마비 장애인이 자신의 삶을 연극무대로 올리는 과정은 정녕 지난한 작업이었다. 당초에는 길어서 일 년 정도를 예상했다. 하지만 몇 마디 언어, 몇 발자국의 운신조차 쉽지 않은 그에게  스태프를 짜고 도우미를 구하고 자금을 마련하는 일 등은 쉽게 넘어설 수 있는 장벽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초반 연습과정에서 자동차에 치여 뇌진탕의 중태에 빠지기도 하고, 겨우 회복되어 마지막 리허설에 들어갈 무렵에는 대장암으로 대장 전부를 들어내어 인공항문을 차고 다녀야 하는 극한상황에 내몰리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각별히 나의 심금을 울렸던 것은 그에게 기적처럼 사랑하는 여자가 생겨 결혼하게 된다면 태어나게 될 미지의 아들에게 음성편지를 보내는 대목이다. 울음과 웃음이 범벅되면서 더욱 힘겨운 발성으로 웅얼거리는 그의 모놀로그는 이렇게 이어진다. "난 몰라. 너에게 장애가 있을지 없을지 말이야. 모든 건 네게 달렸단다. 내 생각엔 만약 네가 너무나 많은 난관들에 맞서 싸워야 하는 인생을 바라지 않는다면 아빠처럼 태어나라고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경험을 쌓고, 세상을 보는 통찰력도 얻고, 마음속으로는 수천 리의 길을 떠나고 싶다면 아빠처럼 태어나도 돼."

무대에 오른 연극 제1막의 제목이기도 한 물음, '내게 살 권리가 있는가?' 야코브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사랑도 해 보고, 상처도 받아 보고, 이런 다채로운 경험들에서 지혜와 통찰을 얻고자 하는 삶이라면 비록 심각한 장애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이 땅에서 당당히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걸.

철학자 칸트는 야코브가 여기서 권리라고 했던 것을 한발 더 나아가서 의무로 규정한다. 그가 어떤 명분으로 행하는 것이든 자살을 부도덕한 행위로 단죄했던 이유는 권리를 포기한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의무를 방기한 무책임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야코브의 마지막 진술도 결국 이 무책임을 겨냥한다. "당신들의 세상. 나의 세상. 기묘하다. 우리 모두 같은 세상을 사는 게 아니던가.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

* EBS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대상 수상작 '내추럴 디스오더'는 9월 3일까지 EBS에서 VOD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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