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준 선물, 산약초] '삼락(三樂)'의 즐거움이 약초에 다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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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타는 즐거움이 하나요, 나누는 즐거움이 둘이요, 먹는 즐거움이 셋이니…

배낭에 약초 캘 도구 하나 달랑 넣고 산야를 누비다 보면 산삼도 만나고, 적하수오도 본다. 약초 산행은 즐거운 '보신 산행'이다.

추석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요즈음엔 아이들도 추석이 심드렁한데,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저씨라서 조상 섬기는 마음이 극진한가 보다 생각했다. 약초 산행을 즐기는 정명호(부산 동래구) 씨 얘기다. 실상은 이랬다. 추석은 또 온 국민이 벌초하는 시기. 추석이 지나면 산길이 말끔해져 약초 산행하기가 한결 수월하다는 것.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더니 천생 약초 산꾼이다. 매주 열 일 제쳐 놓고 22년 된 낡은 승용차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 산야를 찾는 정 씨를 좇아 경남 합천군 묘산면 일대에 약초 산행을 다녀왔다.

"옷은 가급적 긴팔, 긴바지에 낡은 옷을 입고 오시고요. 장갑도 챙겨 오시죠." 준비물은 일반 산행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단지, 낡은 옷을 추천하는 것은 의아했다. 정 씨는 20년 전부터 야생란 동호회에서 활동하다가 2007년부터 산약초로 전향(?)했다고 했다.

야생란 인기 계승한 '약초 열풍'
전국 명산에 약초꾼 발길 이어져

9년 차 열성 약초꾼 정명호 씨
"산삼·백하수오 캐다 술 담고
몸에 좋은 8~10㎞ 산행은 덤
벌초 끝나는 추석만 기다려요"

이유를 물었다. "야생란 인기가 시들했고요. 그러던 차에 건강에 눈을 돌리게 된 겁니다." 끝까지 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회원 김정호(부산 사하구) 씨도 3년 전부터 약초 산행으로 옮겨왔다. 김 씨는 집중력이 대단해 백하수오(백수오) 대물을 자주 캔다고 했다. 뿌리 무게가 500g이 넘으면 대물로 친다.

정 씨의 후배 홍성진(김해시 장유읍) 씨와 선배 신종기(부산 금정구) 씨까지 다섯 명이 한 팀을 이뤘다. 목적지는 경남 합천.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작전 회의를 했다.

"저번에 대물 하수오 캔 곳으로 가 볼까." "그때 큰 놈은 다 캐지 않았나요." "아니 작은 거 두어 개 두고 왔는데." 지형도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합천 일대를 이야기하는데 산행 좀 했다는 기자도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목적지는 경남 합천군 묘산면으로 정했다. 백하수오와 도라지, 제철 약초를 염두에 두었다. "말이 약초 산행이지만 전문 심마니가 아니니 하루에 한두 뿌리면 끝납니다." 정 씨는 보통 500g이 넘는 대물 백하수오는 캐는 데만 4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백하수오 뿌리 자체가 군데군데 잘록한 부분이 있어 잘 끊어지고, 또 긴 놈은 땅속 1m 이상 뻗어 캐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최소한 곡괭이 정도는 들고 다닐 줄 알았는데, 가방을 슬쩍 보니 괭이도 호미도, 낫도 아닌 길이 60㎝ 정도의 배척이 들어 있었다. 굵고 큰 못을 뽑을 때 쓰는 연장으로 한쪽 끝은 장도리 모양으로 생긴 공구다.
약초 캐는 각종 도구
"오늘은 시험 삼아 배척을 갖고 왔지만 원래 드라이버 하나만 갖고 다닙니다." 정 씨는 흔한 괭이나 호미 등의 장비가 아니라 공업사에서 쓰는 큰 일자형 드라이버 하나면 모든 약초를 다 캘 수 있다고 했다.

산자락엔 풀이 짙었다. 각자 원하는 장소에 내려주고, 짧은 장화로 갈아 신은 정 씨의 뒤를 따라 산을 올랐다. 정 씨는 봐 두었던 곳을 찾기 시작했다. 박주가릿과의 백하수오는 약성이 좋아 머리가 하얗게 센 사람이 흑발이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뿌리의 모양도 기묘해 약초 동호인들에게 최고 인기란다.

약초꾼마다 선호하는 장소가 다른데 정 씨는 햇볕이 잘 드는 산소 주변을 골랐다. 솔숲은 소나무 기가 세서 약초를 찾기 힘들다고. 뒤따라가던 기자가 참나무 둥치에 붙은 영지버섯을 발견해 칭찬을 받았다. 1시간을 헤매다 포기하고 내려오다가 백하수오 잎을 발견했다. 하트 모양이었다. 뿌리는 100g 정도의 작은 놈이었다. 캔 자리는 다시 덮고 발로 꼭꼭 밟아 주었다. "뿌리 식물이라 잘린 뿌리에서 싹이 또 납니다. 캔 뒤에는 반드시 흙을 덮어 주어야 훼손이 없죠."
배척으로 약초를 캐는 정명호 씨
정 씨는 적하수오를 봐 둔 곳이 있다며 자리를 옮겼다. 덤불을 헤친 끝에 큰 고구마 모양의 적하수오 두 개를 캤다. 온몸이 흙범벅이다. '낡은 옷'이라고 한 이유를 알았다. 그래도 그제야 숙제를 마친 기분이었다. 연보라 초롱꽃이 예쁜 잔대도 몇 뿌리 캤다. 사삼으로 불리는 약초다.

정 씨가 산삼을 보여 주겠다며 안내했다. 뜻밖에 산삼은 마을 뒷산 작은 오솔길 옆에 있었다. "약초꾼은 '구광'이라고 합니다. 산삼 캔 자리라는 뜻이죠." 구광엔 어린 산삼 몇 포기가 있었다. "심봤다!"

산삼 줄기가 하나면 3년 자란 것이고, 줄기가 늘 때마다 3년 정도가 걸리는데 10년 자라 줄기가 세 개 정도는 되어야 산삼으로 쳐 준다.
귀한 산삼
"채취한 약초로 술도 담그고 우려먹기도 하죠. 사실 약초도 약초지만 한 번 나오면 8~10㎞ 정도 산길을 걸으니 그게 건강에 좋습니다." 정 씨가 추정하는 약초꾼은 전국에 100만 명 정도. 난 동호인이 최대치일 때 그 정도였단다. 인터넷 동호회도 성행하는데 정 씨도 너덧 개 약초 동호회에 가입해 있다. "산행의 즐거움, 나누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까지 약초 산행은 삼락(三樂)이 있습니다. 자연의 선물이죠." 정 씨가 흙 묻은 손으로 땀을 훔치며 약초 산행을 예찬했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적하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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