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창의 고전 다시 읽기] 35.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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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없이도 가능한 마음의 평화

스웨덴의 언어학자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히말라야 라다크 주민들과 16년간 생활하며 경쟁의 삶이 공존의 삶을 몰아낸 뼈아픈 현장을 글로 담아냈다. 사진은 히말라야 라다크 주민들 모습. 부산일보DB

히말라야 고원의 척박한 땅. 빈약한 자원과 혹심한 기후에도 라다크는 1000년이 넘도록 평화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해왔다. 라다크의 주민들은 기운 옷을 또 기워 입고, 동물의 똥을 주워 땔감을 하면서도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좀처럼 성을 내는 법도 없고 매사에 서두르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기 밭의 곡식이 다 여물어도 이웃 사람 밭의 곡식이 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함께' 추수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다. 라다크의 경제는 이처럼 검약과 협동과 자원 순환의 원리를 바탕으로 자립을 이루고 있었다.

히말라야 고원 라다크 마을
욕심도 없고 경쟁도 없는
건강한 생태 공동체의 기록

서구식 산업화 침투 이후
환경 파괴·사회 분열 목도
"개발 이전 공존의 삶 회복을"


그 천국과도 같은 오지를 어떤 용감무쌍한 여성이 찾아갔다. 스웨덴의 언어학자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그 주인공이다. 그녀가 1975년 티베트의 고원인 라다크를 방문한 것은 그곳의 토속 언어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라다크 주민들의 삶에 깊이 밴 생태적 지혜와 공동체 중심의 세계관에 매료된 그녀는 그 후 16년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녀에게 라다크어 문법을 가르쳐준 승려가 전해준 시구는 자신에 대한 객관적 시각이 없었던 서구 지식인에게 의외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래로 가는 길은 하나뿐이 아님을 확신시켜주는 시구였다. "그곳(=유럽)에는 지상의 기쁨도 더 크고/바쁜 생활도 더하다/과학도 문학도 더 많고/사물의 변화도 더하다./이곳의 우리에게 진보는 없어도/복된 마음의 평화가 있다./기술은 없어도/더 깊은 법의 길이 있다."

그러니 그들의 일상에는 경쟁이 스며들 여지가 없다. 그들은 부드러운 속도로 일하고, 놀라울 만큼 많은 여가를 누린다. 라다크 사람들이 실제로 일하는 것은 일 년에 4개월뿐이다. 겨울의 대부분은 서로 어울려 잔치와 파티로 보낸다. 천국이 따로 없다.

그러던 마을에 산업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소위 서구식 개발이었다. 환경 파괴와 사회적 분열이 생겨났고,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등장했다. 영화와 텔레비전은 서구적 삶의 사치와 힘의 이미지를 압도적으로 제공했다. 오랜 세월 유지되어온 생태적 균형과 사회적 조화가 산업주의의 압력 밑에서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돈 없이도 자립했던 경제가 이제 국제적인 현금 경제체제에 차츰 종속되어 갔던 것이다.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1991)는 때마침 현장에 있었던 저자가 이러한 변화의 전후 과정을 기록한 뼈아픈 보고서다. 변화의 핵심은 "소위 서구식 개발로 사람이 땅에서, 서로가 서로에게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간 것이다. 경쟁의 삶이 공존의 삶을 몰아낸 것이다.

그 변화를 코앞에서 목도한 저자는 이후 서구적 '진보'라는 개념 자체를 폐기처분한다. 욕심이라곤 없던 사회에서 이제는 돈을 버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가 되었다. 청동 항아리가 플라스틱 양동이로 대체되고, 야크털 신발이 값싼 싸구려 신발로 대체되었다. 이런 게 진보의 결과일 수는 없는 것이다. 세계 인구의 삼분의 일이 세계 자원의 삼분의 이를 소비하면서 나머지 사람들을 보고 자기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라고 말하는 것은 속임수일 따름이다. 개발은 새로운 식민주의의 그럴듯한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더 정교한 기계와 기술을 동원한 더 많은 자원 착취, 더 큰 시장, 더 큰 이윤을 향한 무자비한 추진력이다. 저자는 라다크에서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로 번져나갔던 산업문명의 폐해를 뼈저리게 목도하고, 그 극복의 가능성을 자연친화적인, 지역경제에 맞는 탈중심화와 적정기술의 응용을 핵심으로 하는 반(反)개발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하고 적극 실천하였다. 태양광 에너지를 이용한 난방장치를 현지 사정에 맞게 보급하고, '라다크 프로젝트'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국제적 연대를 도모하기도 했다.

우리의 현실은? 서구인들조차 성찰과 반성의 대상으로 삼은 지 오래인 그 막개발의 길을 마구 달려가고 있지 않은가. 라다크의 속담을 빌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다시 비추어보자.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인간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 자연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살아왔던 라다크 주민들의 은유는 격조 높고 아름답다.

jhc55@deu.ac.kr


장희창

동의대 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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