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가 열전] 24. 동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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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한 가사·멜로디로 지친 사람에 편안한 휴식처 제공

가장 평범했지만 가장 특별했던 동물원이 전하는 감성은 순수하고 투명했으며 편안한 휴식과도 같았다. 페이퍼 크리에이티브 제공

'동물원'이 등장했던 1980년대 말은 과도기적 시기였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엄혹한 군사독재의 장막이 걷히고 있었지만 진정한 민주화의 길은 아직 요원했기에 캠퍼스는 늘 매캐한 최루탄 냄새로 가득했다. 그런 속에서 많은 이들은 이중생활을 했다.

스크럼을 짜고 민중가요를 불렀지만, 집에 와선 동물원이나 여행스케치의 노래를 들었다. 아직 남아있던 1980년대의 엄숙주의와 다가올 1990년대의 자유주의 혹은 개인주의의 분위기가 혼재하던 시기였다.

김광석·김창기 등 7인으로 시작
사랑타령 아닌 추억 소재로 노래
산울림 김창완 권유로 음반 출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대박
멤버 직업 다양 … 의사·회사원도
프로젝트 팀 결성 명반 '창고' 발표

동물원의 노래들은 그 중간지대에 위치한 아주 특별한 좌표였다. 운동권의 엄숙주의가 애써 외면하려 했던 개인적 영역의 고민들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드러냈지만 주류 가요판을 지배하던 뻔한 사랑타령과는 격을 달리했다. 그들이 전하는 감성은 순수하고 투명했고 편안한 휴식 같았다. 많은 이들이 그 안에서 안식처를 찾았고 따뜻한 위안을 얻었다. 바로 그것이 동물원의 아주 특별한 서정이었다.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특별한 등장

1980년대 후반 동물원의 평범해서 비범했던 등장은 가요계에 파장을 만들었다. 모두가 특별한 것을 원하고 완벽한 것을 추구할 때 그들은 어설프고 덜 세련된 모습으로 세상과 만났다. 많은 이들이 바로 그 점에 환호했다.

그곳에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조금 모자라지만 순수한 자화상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감성의 틈바구니를 동물원은 영민하게 파고들었다. 82학번 동갑내기이자 술친구였던 이들은 1980년대 자신들이 발 딛고 있는 지점을, 억압된 사회 체제와 이데올로기 속에 갇힌 대학으로 판단하고 어느 곳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친구인 이들이 모두 싱어송라이터였다는 점은 서로에게 엄청난 행운이었고, 멀지않은 미래에 고 김광석과 김창기는 대중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뮤지션이 된다.

김광석·김창기·유준열·박경찬·박기영·최형규·이성우 7인으로 결성 당시 '우리는 사회 체제 속에 갇혀 있다'는 의미로 동물원이라는 팀명을 정한 이들은 우연히 이들의 음악을 접한 산울림 김창완의 권유로 음반을 냈다.

데뷔 앨범 '동물원'(1988)은 그 풋풋한 가사와 멜로디로 우리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충격파를 던졌다. 특히, '거리에서'를 부르는 김광석의 절절한 창법과 '변해가네'와 '잊혀지는 것'으로 이어지는 삶에 대한 소소한 감정들에 대한 표현도 비범했다. 많은 이들의 가슴을 무너뜨려버리거나 포근하게 보듬는 김창기의 서정성 안에는 상실과 체념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었다.

이들은 초창기부터 신선함과 뛰어난 곡들로 두터운 팬층을 확보했다. 1988년 1월 발표된 데뷔 앨범에서 이들은 '거리에서'와 '변해가네'로 대학가와 메인스트림을 두들겼다.

타이틀곡 '거리에서'는 대학가와 다운타운가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방송에서도 심심치 않게 전파를 탔다. '거리에서'를 비롯해 '잊혀지는 것', '변해가네' 등을 만든 김창기의 송라이팅 능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고, 유준열도 '말하지 못한 내사랑'을 통해 만만치 않은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룹의 보컬리스트는 김광석이었지만 정작 앨범에서 그가 부른 노래는 많지 않았다. '거리에서' 외에 '말하지 못한 내사랑'은 유준열과 함께 불렀고, '잊혀지는 것'과 '비결'은 김창기가, '변해가네'는 박기영이, '어느 하루'는 박경찬이 불렀다. 대체로 자기가 만든 곡은 자신이 스스로 부르고 있는 모양새다.

이렇듯 동물원은 여타의 그룹들처럼 포지션별로 멤버를 갖춘 꽉 짜여진 형태의 그룹이 아니라 아마추어 노래 동아리와도 같은 느슨한 형태의 협업체제였던 것이다.

1집의 예기치 못한 성공은 그들의 행보를 빠르게 했다. 그 해가 가기도 전 불과 아홉달 만에 동물원은 다시 2집을 발표했다.

2집 '동물원 두 번째 노래모음'(1988)으로 그 놀라움을 더 증폭시킨다. '혜화동'의 그리움에서 '별빛 가득한 밤에'의 감수성, '새장 속의 친구'의 시적 형용, 그리고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의 대중성으로 높은 판매고를 기록하며 이 앨범은 이들의 5집과 더불어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한층 더 탄탄해진 스타일과 안정된 편곡을 보여주면서도 그들만의 순수한 감수성은 훼손되지 않았다. 김창기는 '혜화동'과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통해 히트곡 작곡가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고, '별빛 가득한 밤에'와 '잘 가'로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한 박기영 역시 고정팬을 확보한다. 1집에 비해 완성도 면에서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전작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김광석은 가객 김광석 시대를 열어젖힌 솔로 1집으로, 이성우 역시 솔로 1집으로 전향한 가운데, 김창기·박경찬·유준열 3인 체제로 '동물원 세 번째 노래모음'(1990)을 발표한다.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듬해 박기영의 합류와 함께 '동물원 네 번째 노래모음'(1991)을 발표 후 '아침이면'을 히트 리스트에 올려놓는다. 마침내 댄스 음악이 주류이던 즈음 발표한 역작이자 필자의 애장 앨범인 더블 앨범 5집 '동물원 5-1', '동물원 5-2' (1993)를 통해 19곡을 발표하지만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일곱에서 셋으로…감수성은 여전

이후 기타리스트 출신 배영길 합류 후 '동물원 6'(1995)를 발표해 '널 사랑하겠어'가 다시 차트에 올랐고 이들의 기나긴 생명력을 증언한다.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김창기는 동물원을 떠나 학교 선배이자 같은 정신과 의사인 이범용과 프로젝트 팀 창고를 결성해 대중음악사의 길이 빛나는 명반 '창고'(1997)를 발표한다. 같은 해 발표한 7집 '동물원 일곱 번째'(1997)가 실패한 뒤 유준열·박기영·배영길 셋만 남아 '동물원 여덟 번째 이야기'(2001)를 발표하며 지금까지도 활동을 해오고 있다. 

동물원을 떠난 김창기가 이범용과 프로젝트 팀을 결성해 만든 명반 '창고'.
'우리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수줍던 날의 이야기들'이란 부제로 2003년 발매된 9집 '아홉번째 발자국'(2003)을 통해 동물원 초창기 시절 각각의 사연들로 인해 기존 앨범에 실리지 못했던 18곡의 미발표곡을 더블시디에 담아 발표했다. 남은 세 명 중 두 명은 직업 가수가 되었고, 유준열 만이 회사를 다니며 자신의 꿈을 계속 이루어 가고 있지만 멤버들 각자가 스타일리스트라 할만큼 팀의 조화와 개인의 성향을 뚜렷이 유지하고 있으며, 추억과 그리움에 대한 회고적인 가사와 멜로디로 여전한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김창기는 2000년 자신의 이름을 건 첫 개인 앨범 '하강의 미학'(2000)을 발표해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다시금 받았다.

오랜 공백기를 거친 뒤 2013년 두 번째 앨범 '내 머리 속의 가시' (2013)를 발표하자마자, 9개월 후 '평범한 남자의 유치한 노래'(2014)를 발표하고, '소극장 창기네'라는 공연장도 마련했다. 여전히 가수로, 작곡가로, 정신과 의사로 또 라디오 DJ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동물원의 멤버들은 의사와 회사원 등 각자 음악과는 무관한 별도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물원의 이름으로 뭉쳐 음악을 했다.
그런 느슨함이 결국 1집에서 7명으로 시작했던 멤버가 줄고 줄어 지금의 3인조가 된 원인이 되었을 터이지만 그런 체제가 가진 강점도 분명히 있었다. 동물원이 계속해서 소년의 투명한 감수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과거는 끊임없이 미화되는 것이라 했다. 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가 두고 온 꿈을 전하는 동물원의 서정은 여전히 아름답다.

최성철·페이퍼 크리에이티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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