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속들이 부산투어 - 중구] 피란살이 아픔 녹아 있는 도심 골목마다 역사·사연이 숨 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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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속들이 부산투어' 참가자들이 일제시대 방공호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땅굴을 둘러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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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사, 부산시, ㈔서비스기업경영포럼 주최 '속속들이 부산투어' 중구 편이 폭염 속에서 열렸다. 이 무더위에 참가 신청이 조기 마감되었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8월의 셋째 토요일이던 지난 20일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제과점인 백구당(白鳩堂) 앞에 50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백구(白鳩)'는 '흰 갈매기'라고 했다.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부산 갈매기들, 중구로 날아올랐다.

독립운동 안희제 선생 기린 백산기념관
40계단 아직도 전쟁의 상처 말하는 듯 

창작공간 또따또가 '도심재생의 보물창고'
부산 첫 아파트 청풍장은 개발-보존 기로에

■우리는 지금도 싸우고 있다


백구당 옆 40계단의 주소는 부산 중구 동광동 5가다. 하지만 원래 40계단은 지금 위치에서 25m 떨어진 자리에 있었단다. 한국전쟁 당시 40계단 주변은 피난민들이 구호물자를 내다 파는 장터이자, 헤어진 가족과 상봉하는 장소였다. 지난 1일에는 양정모 씨가 한국 올림픽 출전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한 지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여기서 열렸다. 40계단 일대는 그가 체력 훈련을 하며 금메달리스트의 꿈을 키운 곳이었다. 중구청은 40계단에서 그의 생가터가 있는 300여m를 '양정모 거리'로 지정하려고 추진 중이란다. 

인쇄소가 밀집한 인쇄 골목을 지나쳐오다 '인쇄 골목 사전'이란 작품을 만났다. 1960년부터 시작된 인쇄 골목의 역사를 알 수 있게 만든 설치미술작품. 하지만 오토바이가 떡하니 가로막은 모습이 예술과 문화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

인쇄골목사전 앞에서 이날 해설사로 데뷔한 권미분 씨의 강의 같은 해설이 시작됐다. "'또따또가'는 원도심의 창작공간입니다. 중구 일대는 시청 이전으로 공동화가 진행되며 빈 점포나 사무실이 늘어났습니다. 2010년부터 40계단 주변으로 문화예술인들을 모아 창작공간으로 변모시킨 결과 다시 중구가 부활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로 인문학 강좌가 활발하게 열리는 백년어서원을 지나갔다. 앞으로 백 년을 헤엄쳐 갈 백 마리의 나무 물고기가 백년어(百年魚)다.

대청로를 건너 화국반점 앞에 도착했다. 간짜장 맛있기로는 소문이 난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이다. 권 해설사는 "부산작가회의의 전신인 5·7문학협의회가 1985년 5월 7일 요산 선생을 비롯한 부산의 문인 39명이 여기서 모여 결성됐다"고 설명한다. 잠깐 최영철 시인의 말을 빌리면 이날 요산은 독립군 대장 같았고, 어둑한 화국반점 2층은 임시정부 비밀 아지트 같았단다. 투어에 처음으로 참가한 중국 출신 리수매 씨가 화국반점에 달린 세로 간판을 보고 한 마디 덧붙인다. "중국에서 세로 간판은 100년 전부터 썼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중국집에 가려면 이 세로 간판이 달린 집에 가면 됩니다." 유용한 팁을 배웠다. 
백산기념관에 '우리는 지금도 싸우고 있다'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용두산 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백산기념관이다. 광복 71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백산기념관에는 '우리는 지금도 싸우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플래카드가 걸렸다. 안희제 선생 같은 분들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을 던졌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 하나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백산기념관 바로 옆에는 1918년에 세워진 청자빌딩이다. 부산지역 최초의 금융기관 건물로 옛 한성은행 부산지점이 입주했던 곳이다. 한때 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지만, 근대 건축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부산시가 지난해 18억5000만 원을 들여 매입했다. 생활문화센터로 리모델링하는 사업을 추진한다니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지 기대가 된다. 
한국전쟁 당시 40계단 주변은 헤어진 가족과 상봉하는 장소였다.
■개발과 보존의 갈림길에 서다

부산 중구에 땅굴이 있다? 이 믿기지 않은 이야기가 사실이었다. 동광동 아로마호텔 축대벽에 땅굴 입구가 있었다. 두 번째 땅굴은 반원 형태의 통로로 높이는 2m, 폭은 1.5m쯤 되었다. 입구에서 10m가량 들어가니 양쪽으로 갈라져 2m 정도 더 나아갈 수 있다. 먼저 땅굴에 들어간 사람들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막상 들어가 보니 이유를 알게 되었다. 더운 날씨에 땅 속은 서늘해서 좋았다. 일제시대에 방공호 용도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은 땅굴이다.

권 해설사는 "중구에만 땅굴이 6곳이 발견되어 올해 처음으로 개방을 했다. 벽 반대쪽으로 자갈치나 초량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설도 있다"고 말했다. 중구는 땅굴의 용도와 규모를 조사해 역사적 가치가 있으면 관광상품화할 계획이다. 정말 부산 속을 들여다본 날이었다. 이 땅굴의 끝은 어디일까? 그 끝이 궁금해졌다. 
초량왜관 최고 책임자의 공관인 관수가의 흔적인 37계단.
시간 터널을 통해 좀 더 과거로 들어왔다. 투어 참가자들은 초량왜관 최고 책임자의 공관인 관수가(館守家)의 흔적인 37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관수는 외교교섭 진행 과정을 파악해 본국인 대마도에 보고하고, 현장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관수일기로 남겼다. 관수가는 개항 후 부산부청이나 일본영사관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초량 왜관 안에서 제일 큰 건물이 관수가였다. 규모가 얼마나 되었을까? 담장으로 둘러싸인 초량왜관 부지는 무려 33만 579㎡(10만 평)에 달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이 옛 미화당백화점 뒤쪽의 고갈비 골목이다. 1980년대만 해도 고갈비집 12개가 성업했다지만 지금은 할매집과 남마담 2곳만이 남았다. 지금 부산사람들은 고갈비가 고등어구이인줄 다 안다. 하지만 예전에는 선배들이 고갈비 사준다고 하면 갈비 먹으러 가는줄 알고 따라나섰다 실망한 경우도 있었다. 고갈비집에서 별칭도 많았다. 소주를 '이순신 꼬냑', 막걸리는 '야구르트'로 불렀다. 깍두기는 '못잊어'라고 했다니 참 낭만적이기도 하다. 
1941년에 지어진 부산 최초의 아파트 청풍장.
마지막 코스가 벽돌로 만들어진 부산 최초의 아파트 청풍장이다. 1941년에 지어져 지금은 너무 오래되고 낡아 보인다. 당시에는 집안에서 쓰레기를 버리면 아래로 떨어지는 최신식 아파트였다. 아직까지 옛날 그대로 다다미방이 잘 보존된 집도 있단다. 재개발이냐 보존이냐의 갈림길에 선 청풍장, 길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의 모습 같기도 하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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