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의 시네아트] 비거 스플래쉬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설명 거부하는 모호한 감정들, 익숙한 문법으로 풀어내

인간의 욕망과 관계를 담아낸 '비거 스플래쉬'는 이탈리아 차세대 거장인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찬란 제공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비평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영화들은 몇 가지 닮은 지점이 있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모두가 아는 방식으로 전하는 건 재미가 없다. 그렇다고 좀처럼 접하기 힘든 감정을 연출자 본인만이 해독 가능할 방식으로 풀어가는 영화는 설명을 하기에 난망하다.

대개 평론의 수혜를 받는 영화들은 그 중간에 머문다. 독특한 소재를 익숙한 문법으로 풀어낸 영화나 익숙한 이야기를 독자적인 형식으로 풀어낸 영화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평자의 욕구를 자극한다.

이탈리아 휴양지 찾은 네 남녀
각기 다른 사연·감정이 교차
설명 생략된 여백미가 인상적


이 두 종류의 영화가 공유하는 가치는 다름 아닌 모호함이다. 감독의 의도가 정확하게 전달된 영화만큼 재미없는 영화가 어디 있을까. 어쩌면 창작가와 관객은 영원히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비거 스플래쉬'의 네 인물들처럼 말이다.

록스타 마리안(틸다 스윈튼)은 남자친구 폴(마티아스 쇼에나에츠)과 이탈리아의 한적한 섬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다. 어느 날 옛 남자친구이자 프로듀서인 해리(랄프 파인즈)가 매력적인 딸 페넬로페(다코다 존슨)와 함께 찾아오면서 짧은 평온은 깨진다. 네 남녀의 서로 다른 욕망이 교차하는 이 영화는 사실 익숙하고 진부한 전개라고 해도 무방하다. 교차하는 눈빛만 봐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충 짐작 가능하다.

스토리만 보자면 영화는 실제로 그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지만 그 사이에 일어나는 감흥은 자못 낯설다.

루카 구아다니오 감독이 각 인물들이 품고 있는 사연의 행간과 감정의 향방을 대부분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허락된 건 지중해 햇살의 화사함과 찰나의 감정들이 스쳐 지나간 후의 어색한 시간, 불편한 눈빛, 해리의 장황한 말(혹은 마리안의 침묵)과의 조우다.

3일 선보인 '비거 스플래쉬'는 누구나 예상 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모호한 순간들이 고이도록 조각된 그릇 같은 영화다. 질투, 집착, 신파, 치정 등 어떤 단어로도 이 영화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애초에 감정이 '설명'되는 순간들을 거절하도록 구성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조금씩 비껴나간 순간의 조각들로 맞춰지는 거대한 그림은 보는 이에 따라 실재보다 커지기도 하고 때론 한없이 초라해지기도 한다. 요컨대 여기엔 감정의 덩어리가 고여 있을 뿐 어떤 감흥을 이끌어내는 건 관객의 몫이다. 우리가 칭찬할 수 있는 건 그 익숙한 감정들을 담아낸 그릇의 세공이다.

이탈리아 영화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묻어나는 장면들은 그 자체로 감탄할만한 형식미를 자아낸다. 네 주연배우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다. 찍어낸 감정을 주입하는 스튜디오 영화들과 비교하면 다소 형식적인 과잉이 있을지라도 배우들이 일으킨 커다란 물보라에 기꺼이 몸을 맡기고 싶어진다.

송경원

영화평론가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