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구 메고 떠난 남인도 기행] 17. 세계 最古 연극 '꾸디야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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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역사… 聖(성)과 俗(속) 어우러진 '정교한 신체 드라마'

낭야르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1인 연주로 진행하는 꾸디야땀 공연.

짜쭈 짜끼야르가 어렸을 때 집 근처에 있는 수련장에서 호흡을 이용해서 죽는 장면을 연습하고 있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비디아(의사)가 우연히 그 연습하는 장면을 보고는 깜짝 놀라 다급하게 짜쭈 짜기야르의 집으로 달려가 외쳤다. "큰일 났소! 댁의 아들이 다 죽어가고 있소!" 이를 본 짜쭈 짜끼야르의 삼촌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냥 죽게 내버려두십시오. 죽기 시작한 지 벌써 몇 주째랍니다."

시로 된 이야기, 눈짓·손짓 표현
연희자들 평생 길고 혹독한 수련

2001년 유네스코 문화유산 선정
토착-이주문화의 절묘한 어울림
'다름' 배척 않는 동반문화의 정수

2001년 유네스코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지정한 구전과 인류무형문화유산에 꾸디야땀 이름을 처음으로 올렸다. 꾸디야땀은 케랄라에서 전해 내려오는 2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극 중 하나다. 기원전 2세기 전부터 시작해서 12~14세기에 전성기를 이뤘던 꾸디야땀은 어려운 산스크리트어 시에 치중함으로써 점차로 대중과 멀어지게 되었다. 대중들은 자연히 산스크리트어로 이루어진 꾸디야땀을 어려워했고 더욱 쉽게 볼 수 있는 노래와 춤으로 된 민속춤들을 보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바사의 희곡 13편이 케랄라 남단의 티루바난다뿌람에서 발견되면서 꾸디야땀에 대한 관심과 지원도 급물살을 탔다. 바사는 기원전에 북인도에서 활약했던 위대한 산스크리트어 극시인이다. 지금은 정부의 후원과 공립 학교 설립을 통해 꾸디야땀과 후진양성 교육이 대중들에게 열려 있지만 예전에는 짜끼야르 계급만이 힌두 사원 안에 만든 사원극장에서만 공연할 수 있었다. 짜끼야르 계급은 연극연기자들이나 가창자들의 공동체인데 사원에 봉사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상위계급인 브라만 계급의 여인이 죄를 짓고 카스트에서 추방된 동안 태어난 아이들이 여기에 속한다. 꾸디야땀 수련자들은 다른 공연예술 관람이 금지되어 있었고 고유한 전통을 계승하는 데만 평생을 바쳤다. 사원극장을 꾸땀발람이라고 한다. 꾸디야땀 공연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한 것은 1950년대가 지나서였다. 꾸디야땀 반주 악기인 미라브도 함께 공개되었다. 미라브는 사원에 예속된 악기로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이 악기는 양반을 대하듯 성인식도 치르고 소명을 다 한 뒤 낡아서 못 쓸 때에는 화장을 시킨다. 비힌두교도들을 위해 꾸땀발람도 사원 밖에 지음으로써 꾸디야땀은 성역에서 세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라브를 치는 아이의 깜찍한 모습.
꾸디야땀은 사원에 행사가 있을 때 보통 41일간 매일 공연한다. 설령 관람자가 아무도 없다손 치더라도 공연을 강행한다. 신에게 바치는 공양물이기 때문이다. 신심 어린 연희자들은 아무리 명예로운 자리에 초빙되더라도 41일간의 무관람자 공연을 완수하기 위해 그 자리를 고사하곤 한다. 어떤 분은 모두가 가고 싶어 안달하는 해외초청공연 섭외를 받고는 "우리 집 소한테 여물 먹일 사람이 없어서 가기가 힘들 것 같네." 하고 거절하신 적도 있다.

시로 된 이야기를 눈짓과 손짓으로 정교하게 연희하는 꾸디야땀의 핵심은 연기자의 호흡 통제에 있다. 호흡 조절로 삶과 죽음의 순간을 심혈을 기울여 절묘하게 표현하는 순간은 정말 경이롭다. 꾸디야땀 연기의 이 은근한 매력은 많은 외국인을 끌어당긴다. 춤과 노래뿐 아니라 산스크리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요구하는 작업인지라 한 번 발을 디딘 외국인들은 대부분 평생 꾸디야땀과 함께 한다. 내가 처음 꾸디야땀의 맛을 느꼈던 곳인 중부 케랄라에 있는 이린얄라꾸다에서도 그런 일본인이 한 명 있었다. 그 일본인은 10년 넘게 꾸디야땀을 수련하며 공연에 동참하고 있었다. 인도의 유명한 산스크리트 극시인 칼리다사가 쓴 작품 '샤쿤탈라'를 나흘 동안 연행하는 행사였다.

사냥하러 갔다가 우연히 숲에 사는 샤쿤탈라를 본 두샨타 왕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숲에서 결혼했고 두샨타 왕은 사랑의 징표로 반지를 샤쿤탈라에게 선물한 뒤 왕궁으로 돌아갔다. 사랑에 빠진 샤쿤탈라는 성자가 방문했음에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성자는 왕의 기억을 지우는 저주를 내렸다. 후에 너무 심했다고 생각한 성자는 왕이 반지를 보면 기억하도록 했다. 샤쿤탈라는 약속한 왕이 오지 않자 왕을 찾아 나섰는데 배에서 풍랑을 만나 그만 반지를 잃어버렸다. 왕을 찾아 갔지만 왕이 자신을 전혀 기억조차 하지 못하자 말할 수 없는 좌절과 슬픔에 샤쿤탈라는 아들을 데리고 숲으로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한편 한 어부가 낚시로 잡은 물고기 뱃속에 왕의 반지를 발견하고 왕에게 진상하자 반지를 본 두샨타 왕은 그제야 샤쿤탈라의 존재를 깨닫고 샤쿤탈라를 찾아 나섰다. 사자의 입을 벌린 채 이빨 개수를 세고 있는 용감한 아이가 자기 아들임을 알게 되고, 샤쿤탈라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연희전문 강습 대학인 칼라만달람의 공연 전용 사원.
샤쿤탈라 공연장에는 당시 카타칼리를 함께 공부하던 일본인 친구와 동행했다. 나는 일본인 친구가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 아주 반가워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 그 친구는 "음~~ 눈동자 움직임이 좋네." 한마디 하고 말뿐이었다. 당시에는 일본인 친구가 조국 동포를 보고도 얼싸안고 반가워하지 않는 게 의아했는데(당시만 해도 케랄라는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한국인을 길 가다 만날라치면 그렇게 나는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무언가에 심취한 사람들은 국적보다는 그 심취한 대상에 더 반가움과 관심을 가지게 됨을 경험을 통해서야 깨닫게 되었다.

꾸디야땀에는 가장 고상하고 세련되게 정제된 것과 투박하고 원시적인 것이 공존한다. 모음이나 자음 하나의 발음에까지 지극한 정성을 쏟으며 정확하게 발음하고 장단을 맞춰 정교하게 노래하는 한편 온몸에 검은 칠을 하고 뾰족한 모조 가슴을 붙인 연희자가 기괴한 고함을 치거나 문란한 춤으로 시선을 끌 때도 있다. 그것은 마치 고요한 호수 가운데 던지는 바윗돌과 같아서 그 파장이 아주 크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원시적이고 다듬어지지 못한 것으로 비질 수 있지만 거대한 바다가 파도로 이루어진 것처럼 그것은 꾸디야땀의 일부기도 하다.

꾸티란 함께 함이고 야땀은 연기함이다. 꾸디야탐에는 복합적인 것들이 함께 어우러진다. 그 함께 함에는 엄숙함과 난잡함, 성스러움과 속됨, 경건함과 우스꽝스러움 뿐만 아니라 토착문화와 이주문화, 주인공과 조연의 결합이 들어 있다. 또한 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와 말 언어인 말라얄람어도 섞여 있다. 배척하지 않고 다른 것들을 조화롭게 섞어놓은 진정한 의미의 동반문화 정수를 보여주는 꾸디야땀에는 인도 문화의 정수가 녹아 있다. ttappun@hanmail.net

변영미

문화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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