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무서운 분, 우스운 자, 같잖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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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언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 늙은 훈장이 살았다. 그 당시 교육이란 게 무조건 경전을 줄줄 외게 하는 거라 이 영감님 노상 회초리를 손에 달고 살면서 아이들을 무섭게 닦달하니 인근에 호랑이 훈장으로 악명이 높았다. 학동 중에도 칠복이란 놈은 머리가 영 아둔해 회초리 찜질 단골손님이었는데, 하루는 이 녀석이 대오각성하고 밤을 새워 공부했다. 다음 날 선생님 앞에서 보란 듯이 얼음판에 바가지 밀듯 소학 한 구절을 줄줄 읊으니 경악을 금치 못한 훈장은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여러 멍추들 앞에서 마구 침을 튀기며 오늘의 영웅을 치켰다. 그러자 칠복이가 내친김에 과연 사도(斯道)의 군자답게 "스승님, 과찬의 말씀이옵니다"라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했는데, 평소 가는귀가 먹은 스승께서는 "뭣이라고? 같잖은 말씀이라고? 네 이 빌어먹을 놈!"하고 주무실 때 베는 참나무 목침을 냅다 집어던졌다. 불의의 투척에 이마빼기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뛰쳐나온 불운지사(不運之士)는 "제기! 천재를 이렇게 대접하다니!"하고 투덜거리며 동구 밖으로 내뺐다. 무서운 분이 스스로 졸지에 진짜 같잖은 놈이 돼 버린 것이다.

무서운 얼굴 해야 살아남는다?
포효하는 사회지도층 꼴같잖아
미소 띤 나직한 타이름 그리워

우리 주위에는 직업상 무서운 표정을 지어야 할 분이 많다. 가령 사법의 정의를 추상같이 집행하는 판·검사나 경찰관이 노상 해해거리는 얼굴을 해서는 도적이나 흉악범들이 우습게 여긴 나머지 사회 기강이 개판이 되어 버릴 것이니, 그런 분들은 날 때부터 호상(虎相)이거나 혹은 후천적으로 절 입구에 버티고 선 사천왕(四天王)을 본떠 눈을 퉁방울같이 뜨고 도베르만 같은 이빨을 드러낸다 한들 누구 말마따나 "개돼지 같은 우리 민중"들은 아무 거역지심(拒逆之心)을 일으키지 아니할 것이다. 한데 문제는 오늘날 사회의 모든 족속이 다들 무서운 얼굴을 지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정말 법 없이도 넉넉히 살 원로교수 한 분께서는 약주에 불콰하시면, "이봐! 사실 나 무서운 사람이야!" 하며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이 버릇이었다. 너무도 착한 나머지 교활한 훈장 사회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신 그분의 위악적 고백이 충분히 이해되는 바이로되, 댁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내게 기대어 주무시는 그 얼굴은 기실 무서움이 아니라 우스움의 표상이었다. 코미디언 김희갑을 닮은 그 합죽한 동안(童顔)을 존경하고 좋아했으니 그가 정말 악역 전문배우 허장강이나 이예춘이 맡은 역할처럼 흉중에 무서운 살의와 흉계를 감추고 있는지 여부는 우리가 알 바 아니었다. 사람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진정한 카리스마는 무서움에서 나오는 게 아님을 삼척동자도 다 안다. 이치가 그러한데도 사람들은 남들에게 무섭게 보이지 않으면 자신의 자존심이 깎이고, 남들이 자신을 우습게 알고 나아가 같잖게 여기리라 철석같이 믿는다.

서양 관상학의 대부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실과 이성을 중시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가 주장한 것은 이른바 동물학적 유추에 의한 관상술인데, 이를테면 양을 닮은 이는 성품도 어질고 승냥이 얼굴을 한 자는 마음도 모질고 흉포하다는 식이다. 집에서 두 마리 이상의 개를 키워 본 애견가들께서는 잘 아시겠지만, 개들이 먹이와 애정을 다툴 때 짓는 표정은 정말 가관이다. 콧구멍을 잔뜩 찡그리고 이빨을 있는 대로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며 가능한 모든 무서운 표정을 동원하고 소리를 내는데, 자기들로서는 절박한 심정에서 나온 본능적 행동이겠지만 보는 자로서는 포복절도할 우스운 광경임에 틀림없다.

길거리에서 인상을 쓰고 스쳐 가는 너절한 군상들이야 그냥 불쌍하다고 넘길 수 있겠지만, 오늘도 흉측한 동물의 얼굴로 높직한 단상과 회의실에서 포효하고 날뛰는 소위 사회의 지도적 계층들을 볼작시면 그 언행이 참말 우습고 같잖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어디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야차나 마귀의 얼굴을 한 채 어린 양과 중생들을 질타하셨던가. 그분들을 닮은 잔잔한 미소와 나직한 타이름이 그립다. 아미타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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