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혐오] 지금, 혐오(嫌惡 : 미워하고 싫어함)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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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 내가 얼마나 여자를 좋아하는데. 여성 혐오라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 여성 혐오는 관련이 없거든요.

"요즘 같은 여성 상위 시대가 어디 있어? 지하철에 여성 전용칸이 생긴 것만 봐도 오히려 남성 혐오 시대 아니야?"라고 말하는 당신, 여성 혐오를 하셨네요.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2015, 현실문화)라는 책에서 여성학자 정희진 씨는 "자본과 노동이 같은 대우를 받지 않듯, 인종 차별이 백인에 대한 차별을 의미하지 않듯 여성 혐오와 남성 혐오는 반대말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 사건은 조현병을 앓고 있는 정신병 환자의 '묻지마 살인'이냐고요? '묻지마 살인'이라면 앞서 화장실을 찾은 7명의 남자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겠죠. 피의자는 가장 만만한 스물셋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여성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로 인한 여성 살해(femicide·페미사이드)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때문에 강남역, 부산 서면, 대구 동성로 등지에 자발적으로 모여 포스트잇을 붙이고 추모했습니다.

여성 혐오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지난 16일 영국의 EU 탈퇴 반대파인 조 콕스 의원이 총격을 당하고 또 수차례 흉기에 찔렸습니다. 미국 신생 매체 복스(vox.com)는 이 사건에 힘 있는 자리에서 일하는 여성에 대한 혐오가 깔려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콕스 의원이 숨지기 3개월 전부터 증오의 내용이 담긴 메일을 받는 등 살해 위협을 받았던 것이 그 예입니다. 같은 영국 노동당 소속 여성 의원인 제스 필립스 의원 역시 하룻밤 사이 트위터에서 600여 건의 강간 살해 위협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다른 방향으로도 한 번 생각해보죠. TV 드라마, 영화에서 사투리를 쓰는 캐릭터가 보통 어떤지 떠올려 보세요. 사회적 약자이거나 무식하거나, 혹은 가장 폭력적인 사람인 경우가 많지 않나요. 한국 영화에 묘사된 조직 폭력배는 십중팔구 경상도 아니면 전라도 사투리를 씁니다. 표준어를 쓰는 조폭은 찾기 어렵습니다. 일종의 지역 혐오입니다.

최근 수도권에서 영남의 가장 큰 이슈인 신공항에 대해 가지는 '지역에 왜 허브 공항이 필요한가'라는 논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두고 지역 혐오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 소수자들은 어떤가요. 미국 올랜도 유명 게이 클럽에서 49명이 총격을 받아 숨지고 53명이 부상했습니다. 피의자 오마르 마틴(29)이 IS 추종자였다, 테러다, 성 소수자들을 증오해 일어난 증오 범죄다 등의 말이 많습니다. 그가 IS 대원이든 아니든 하고많은 장소 중 게이 클럽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 성 소수자들은 이를 명백한 성 소수자 증오 범죄로 규정하고 세계 곳곳에서 추모식을 거행했습니다. 지난 23일 부산에서도 성소수자 인권동아리가 남포동에서 올랜도 총기 난사 사건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혐오(嫌惡)'를 검색해 봤습니다. '싫어하고 미워함'이라는 뜻입니다. 앞서 살펴봤던 혐오의 대상은 모두 우리 사회에서 약자로 여겨지는 집단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나와 다르거나 나보다 약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혐오할 권리가 있는 걸까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혐오의 양상은 모두 약자를 대상으로, 싫어하고 미워함을 표출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구나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정희진 씨는 위의 책에 쓴 '언어가 성별을 만든다'라는 글에서 말했습니다.

"지구상에는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성이 아니라 남성과 '그 밖의 성'(성 소수자, 아줌마, 가난한 남성, 노인, 제3세계 사람…)이 살고 있다."

과연 나는 나 이외의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혐오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조영미 기자 mia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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