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신감격시대
/김성언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숨 쉬는 거리다!/미풍은 속삭인다! 불타는 눈동자./불러라 불러라, 불러라/불러라 거리의 사랑을!" 코흘리개 시절 술 취한 어른들이 쉰 목소리로 악을 쓰며 부르던 것을 뜻도 모르고 따라 흥얼거렸던 유행가 첫 구절이다. 남인수가 불러 히트 친 가요 '감격시대'인데, 일제의 핍박 아래 온갖 고초를 겪다가 해방을 맞은 감격이 솟구치다 못해 질펀하게 흘러넘친다. 아득한 지구 저편 '희망봉'을 도는 '행운의 뱃길'에, '희망의 대지'를 '휘파람 불며' 질주하는 '내일의 청춘'이 불쑥 나왔다가, 갑자기 "백마야 달려라!"까지 등장하니 과연 냄비 열정에 불타는 배달민족의 정서에 딱 맞는 가사라 하겠다.
억지·생떼로 감격 강요하는 세태
나라 곳곳에 냄비 열정 들끓어
이성과 양식이 새삼 그리운 시대
그래서인지 조국 광복의 연륜이 벌써 일흔 해 넘어 쌓인 오늘에도 나라 곳곳에 감격시대가 봇물을 이룬다. 조폭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 드라마,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한정식집, 짜장면집, 하다못해 양대창집, 돼지구이집까지도 상호가 감격시대다. 먹고 마시며 마음껏 감격을 누리라는 상업적 배려인 모양인데, 만주벌판을 외롭게 말달리며 오직 대한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선구자들께서 이제 환생하셔서 감격시대 술집에서 소주에 삼겹살을 한 점 자신다면 이 태평성대를 과연 기뻐하실까, 혹은 철없는 후손들의 말장난을 개탄하실까?
세계사를 곰곰이 뜯어보노라면, 동서고금을 헤아릴 것 없이 어느 민족, 어느 나라나 다 제 나름의 감격시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의 경우, 시저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가 실질적 황제가 되어 팍스 로마나를 달성하자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영웅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조상 대대로/우리들은 불요불굴의 민족이노라" 하고 의기양양해했다. 동시대 시인 프루덴티우스도 "로마의 위세, 우주의 끝까지 미쳐 이렇게 빛나도다" 하고 감격해 마지않았다.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 대혁명과 독일 낭만주의, 그리고 이탈리아 통일의 열기가 만들어 낸 감격은 오늘날의 세계사를 이룩한 주동력이었다.
감격(感激)의 격(激)은 냇물이 바위에 부딪친다는 뜻이다. 물살이 바위에 부딪치니 물보라와 소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당나라 대문호 한퇴지(韓退之)는 제자를 전송하며 쓴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란 편지에서 물이 바위에 부딪쳐 큰 소리를 내는 것처럼 사람도 난관이나 환희에 처했을 때 크게 울게 마련이라고 했다. 시인은 누구인가. 동시대의 뭇 사람을 대신해 크게 잘 우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 시인은 감격시대를 잘 우는 목청 큰 울보다.
바야흐로 한국도 감격의 신판 백가쟁명(百家爭鳴) 시대다. 한데 잘 우는(善鳴) 시인이 국가의 태평성대를 멋지게 울거나 민중의 고통을 대신 큰 소리로 울어 우리를 감격시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제 음험한 목적을 위해 억지와 생떼로 감격을 강요하는 시대다. 거리와 마을, 정치판과 저널, 어디라 할 것 없이 눈물과 격분을 짜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구호를 외치는 이들은 걸핏하면 삭발을 하는데 이젠 삭두(削頭)라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낼 수 없다. 대중오락의 총아인 드라마는 막장과 기괴에다 판타지까지 더해야 가까스로 여성 동지들의 시선을 끈다. 한마디로 감격의 변태가 성행하는 시대요, 사람을 감동시켜 사기를 친다는 격궤(激詭)란 한자어가 딱 들어맞는 때다.
하지만 격정의 불길이 쓸고 간 자리엔 차디찬 재만 남는 법. 자유와 자연주의 교육학의 선구인 '에밀'과 '신엘로이즈'를 써서 감격시대를 주창한 루소는 낭만의 이름 아래 사생아만 여럿 낳아 모조리 고아원에 보냈고,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주역인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죽음에 감격한 청년들의 자살이 잇따르자 슬그머니 고전의 고향 이탈리아로 줄행랑을 쳤다. 인간의 감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감격이 연출하는 광란의 무도에 숨죽이고 있는 이성과 양식이 새삼 그리운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