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는 늘 옳다? 때로는 임시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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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의 엄지

"유전자가 유전자를 변화되지 않은 채 보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몸이다. 우리는 유전자라고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들을 보전하도록 프로그램된 로봇 전달자다."

1992년 국내에 처음 출간돼 지금도 꾸준히 과학과 유전학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책 '이기적 유전자'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이런 주장을 폈다. 다윈의 진화론에 뿌리를 두긴 했지만 에드워드 윌슨으로부터 새로 가지를 치기 시작한 이런 학설을 사회생물학이라고 부른다.

사회생물학·점진진화론 반박
발목뼈서 분화된 판다 엄지로
진화의 '불완전한 변화' 설명
특정 과학이론 맹신 경고도

또 진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 가운데서도 '진화는 주변부의 격리된 집단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발생'했다고 믿는 점진론자들이 대부분이다.

고생물학과 지질학, 진화학을 평생에 걸쳐 연구하며 대중적 저술활동을 활발하게 펼친 지은이는 '판다의 엄지'에서 이런 주장에 반기를 든다.

우선 사회생물학, 정확히는 도킨스에 대한 반격을 지은이는 이렇게 펼친다. 도킨스도 유전자에게 뭔가를 계획하고 구상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전자는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행위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도킨스도 논거를 공유하는 다윈의 '자연 선택'에 유전자가 직접 노출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은이는 지적한다. 오로지 선택되는 매개체는 생물의 신체일 뿐이다. 유전자는 그 신체의 세포 속 DNA에 숨겨진 지극히 작은 물질이다. 

판다의 앞발. 발가락 5개 외에 발목뼈의 일부인 요골종자골이 커져 엄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 폐쇄적인 중국 서부 산악지방에 서식하며 오로지 대나무만 먹고 살아야 했던 환경에 적응하느라, 임시변통 격으로 진화가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이언스북스 제공
지은이는 도킨스의 이론이 서구의 과학적 사고에 얽혀 있는 여러 악습, 예컨대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전체를 결정한다는 환원론이나 결정론에서 유래했다고 지적한다. 이런 환원론이나 결정론은 작은 범위의 단순한 현상을 해석하는 데는 유용했을지 몰라도, 오랜 진화의 역사를 몸에 담고 있는 생물을 분석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점진 진화론에 대한 반박으로 지은이는 '단속 평형론'을 주장했다. 생물 계통은 각각 역사의 대부분 기간 동안 거의 변화하지 않지만 이따금 급격하게 일어나는 종 분화라는 사건으로 그 평온함이 깨진다. 진화는 이렇게 끊겼다 이어졌다 하는 단속과 차등적 생존의 결과다.

또 일부 과학자들은 뇌 분석 결과 특정 인종이나 남녀 사이에 용량 차이가 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1억 년 동안 지구를 정복했던 공룡이 순식간에 멸종된 것도 몸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뇌 때문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에 대한 지은이의 입장도 단호하다. 인간의 특정 집단을 생물학적으로 평가하려는 모든 시도를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라고 꼬집는다. 공룡은 정교한 사회 체계를 갖고 있었으며, 멸종은 생명계가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지 실패의 징후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지은이가 월간지 '내추럴 히스토리'에 연재한 칼럼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은 미국에서 1980년 발간됐고, 국내에는 1998년 처음 번역, 소개됐다. 앞발 다섯 발가락 외에 발목뼈에서 분화돼 인간의 엄지처럼 쓰이고 있는 판다의 엄지를 통해, 진화가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는 합목적적 활동이 아니라 때로는 임시변통처럼 보이는 불완전한 변화를 거치기도 한다는 점을 보여 줬다.

사회생물학적 풍조가 먼저 소개돼 선풍적 인기를 끌던 한국 사회에서 진화론과 과학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제시하는 책으로 널리 소개됐다.

'우리를 이끄는 철학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 있다'는 합리적이고 겸손한 그의 논지는 각 에세이를 관통하는 자세다. 특히 이번 개정판이 의미를 갖는 것은 옮긴이가 지적했듯이 2004~2005년 한국은 물론 세계 과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황우석 씨 사건처럼, 과학을 맹신하며 근거 없는 권위와 명예를 부여하는 우리 사회의 그릇된 풍토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책은 100년 전 영국에서 벌어진 희대의 화석 조작사건 '필트다운 인' 사례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프랑스보다 고인류 화석이 부족해 자존심이 상했던 영국인들이 갈망하던 차에, 오래된 것처럼 조작된 인간의 뼈가 제시된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고고학자들은 이 엉성한 사기극을 최고의 발견으로 치켜세우는 데 바빴다.

"과학이 개인의 희망이나 문화적 편견, 영예에 대한 욕구로부터도 추진될 수 있으며, 실수나 잘못으로 엉뚱한 경로를 거치는 과정에서 자연에 대한 한층 깊은 이해에 이르기도 한다."

결정론이나 환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책만큼이나 이렇게 겸손하고 냉철한 자세를 지향하는 학자의 저술은 널리 읽혀야 한다. 균형 잃은 편협한 시각을 가진 시민이 더 많은 사회는, 과학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 모든 영역에서 언제든 영악한 사기에 놀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김동광 옮김/사이언스북스/464쪽/2만 2천 원.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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