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가 열전] 6. 뮤지션 유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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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때문에' 단 한 장의 앨범으로 전설이 됐다

가수 유재하의 앨범 대한민국 가요 수준을 몇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재하 음악장학회 제공

1987년 11월 1일. 당시 25세 청년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본인의 이름이 새겨진 솔로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1987)를 세상에 내놓은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의 갑작스러운 사고였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스물여덟 주기가 지났다. 그는 알고 있을까. 그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유재하의 적자(嫡子)들이 이루어낸 1990년대의 가요 감성이 이리도 넓은 하나의 숲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단 한 장의 앨범으로 대한민국 가요의 수준을 몇 단계 끌어올려 정서적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게 만들어준 천재 뮤지션, 유재하다.

25세 천재 음악가의 유일한 앨범
그의 음악 영향받은 후배들 '줄줄'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음악 열정
클래식과 재즈도 대중가요 접목
키보드 연주자로 조용필과 인연

수록 9곡은 유재하 미학의 정수

■영화배우 이소룡 좋아해 흉내 내기도


봄여름가을겨울의 전태관과 유치원 시절부터 함께 놀았던 어린 유재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했다. 또래 친구들은 딱지치기와 담을 타고 놀 때 유재하는 어니언스(이수영, 임창제)의 노래를 부르며 혼자 그렇게 놀았다. 특히 영화배우 이소룡을 좋아했던 유재하는 헤어스타일과 패션까지 이소룡을 따라 했고 매일 이소룡 흉내를 내며 다녔다고 한다. 훗날 유재하 앨범의 재킷 그림을 그려준 세계적인 설치미술가이자 스타 아티스트인 서도호 작가 역시 어린 유재하의 유별난 친구 중 한 사람이었다. 음대를 가기로 작정하고 피아노 레슨을 받았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클래식보다는 대중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유재하는 당시 레슨을 해주던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어도 숙제는 안 하고 혼자 곡 쓰고 노래만 하곤 했다.

한양대 음대 작곡과에 진학 후 정원영, 전태관, 김종진, 박성식, 장기호 등과 교류하며 매일 모여 함께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특히 정원영과 교류가 돈독했는데 키스 자렛, 팻 메스니, 에버하르트 베버, 마일즈 데이비스 등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봄여름가을겨울 김종진의 소회에 의하면 늘 방 안에서 래리 칼튼의 'Room 335' 등을 따라 연주했던 유재하는 김종진보다 기타를 더 잘 쳤다고 한다. 순수 음악을 전공했지만, 대중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왔던 유재하는 작곡뿐만 아니라 작사, 편곡 그리고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여러 악기에 능통했다.

결국 유재하는 대학 졸업을 앞둔 1984년, 클래식과 재즈를 대중 가요에 접목하는 음악적 지향점을 세우게 된다.

사진은 유재하 친필 악보 복사본.
■송홍섭, 김광민, 한영애와의 깊은 인연

이듬해인 대학 재학 중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연주자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조용필은 훗날 유재하의 대표곡이 되는, 시대를 앞서간 팝발라드 '사랑하기 때문에'를 자신의 7집 앨범 '趙容弼 7集'(1985) B면 두 번째 곡으로 취입한다. 당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미국과 일본 투어를 앞두고 건반 연주자를 찾았고 김광민과 정원영의 소개로 유재하를 처음 본 밴드 마스터이자 프로듀서 송홍섭은 유재하와의 만남을 이렇게 기억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유재하는 굉장히 얌전한 학생이었고 성품도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팝 음악에 대한 욕망은 대단했던 걸로 기억했다. 유재하는 향후 팝 음악에 있어서 자기 깃발을 확실히 꽂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후 유재하 본인이 만든 곡이라며 조용필이 부를 수 있도록 소개해 달라며 '사랑하기 때문에'와 '우리들의 사랑' 2곡을 들고 왔다. 메이저 장조의 발라드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조용필도 이내 유재하의 노래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취입한 곡이 '사랑하기 때문에'였다.

그즈음 세션 연주 활동을 많이 하던 김광민과의 교류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음악 관계자들에게 유재하를 소개하는 등 음악적으로나 음악외적으로 막역한 관계를 유지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멤버로 함께 활동할 당시 유재하가 학교의 승인을 받지 못해 일본 공연에 함께 가지 못한 아쉬움을 두고 두고 토로하기도 했다. 김현식은 자신의 음악적 컬러를 강화하기 위해 백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하는데 유재하가 키보드를 맡았다. 비록 3집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1986)이 나오기 전 유재하가 팀을 탈퇴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유재하는 김현식에게 자신의 곡 '가리워진 길'을 헌정한다.

한영애도 빼놓을 수 없다. 프로젝트 팀 '신촌블루스'의 창단 멤버로 활동하면서 대중적 지지와 음악적 완성도를 만족시킨 최고의 앨범으로 꼽히는 2집 '바라본다'(1988) 작업에 들어가면서 곡을 의뢰하던 한영애는 유재하에게도 한 곡을 부탁한다. "누나가 부를 거면 나는 언제든지 좋다"며 흔쾌히 곡을 주었다. 유재하가 직접 피아노를 치며 부른 데모 테이프가 왔고 그 곡이 바로 2집 A면 세 번째 수록곡인 '비애'다. 한영애의 기억에 의하면 그 데모 테이프에서 유재하는 노래를 굉장히 잘 불렀고, 당시 유재하는 "누나! 이 노래 누나가 꼭 히트 시켜줘야 해! 아니면 내가 다시 불러서 꼭 히트시킬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 곡이 실린 앨범은 유재하가 세상을 떠난 뒤에 발매가 되었다. 남겨진 마음을 앨범 속지에 전하고 있기도 하다.

1987년께 프로듀서 송홍섭이 유재하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김현식 4집'의 프로듀서를 하게 되었을 때였다. 송홍섭이 기억하는 당시의 유재하는 예전의 대학생 모습이 아닌 프로페셔널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당시 유재하는 김현식과 너무 친해서 매일 둘이 술 마시면서 같이 지냈다. 유재하가 노래를 만들어 김현식에게 선물했고 김현식은 그런 유재하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바로 '그대 내 품에'란 곡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가수 유재하의 앨범.
■전설이 된 첫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

1987년 8월 마침내 국내 대중음악 사상 처음으로 작곡, 작사, 편곡을 혼자서 한 '음악적 자주의 완전 실현'을 일궈낸 기념비적 성과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유재하의 첫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가 발매되었다. 이 단 한 장의 앨범으로 전설이 된 유재하는 클래식에 바탕을 두고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과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등의 활동을 통해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혔다. 시로 쓰고 음으로 노래한 미학적 가치는 대중음악사적으로 가치를 논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유재하가 들려주던 대중가요는 이미 클래식이 되어버렸다. 음악에 있어서 리듬과 코드 진행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또 음악가의 재기는 그것들에 의해 심판을 받더라도, 실제로 대중은 아름답고 감성적인 멜로디의 흐름을 쫓아간다는 사실을 천재적으로 구현해내었다.

이처럼 지극히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단출한 수록곡 9곡은 그야말로 멜로디의 성찬이라는 점에서는 예외가 없다. 소위 말하는 한국형 발라드의 원조이니 싱어송라이터의 표본을 제시했다느니 하는 미사여구는 사족일 뿐이다. 비평과 음악사적 위상 위에 올라앉은 '유재하만의 미학적 가치'가 바로 이 앨범이다. 유재하의 음악적 비전을 닮으려는 후배들이 머지않아 더 깊고 울창한 숲을 이룰 수 있기를 고대한다.

최성철·페이퍼레코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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