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 양심가게] 주렁주렁 맺히는 '선한 마음' 주인도 손님도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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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군 장안읍 대룡마을 '아트인오리' 무인카페에는 다녀간 사람들이 걸어 놓은 메모지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강원태 기자wkang@

양심을 지키면 손해를 본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사회는 나쁘다. 양심을 지키고, 양심에 의지하고, 양심을 믿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 그들이 맞았다. 양심을 지키면서 기분 좋게 살아가는 여러 양심 가게 주인과 손님들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대연동 '한성복사'
'고맙습니다' 메모에 가슴 뭉클
무인 운영, 영세 복사업자 살려

기장 대룡마을 '아트인오리' 무인카페
창고 개조한 휴게공간을 카페로
방문객이 남긴 쪽지 천장에 가득

김해 상동면 '들풀마당'
명퇴 후 공기 좋은 시골에 정착
"양심에 기대는 카페로 새 꿈 꿔"

■양심이 살렸다


부산 남구 대연동에는 오래된 복사가게가 있다. 정식 상호는 한성복사 디지털 출력소이지만 인근 대학생들에게는 '양심 복사가게'로 통한다. 이 복사가게가 독특한 것은 계산만큼은 무인 방식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40㎡ 크기의 작은 복사가게는 26년이나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원래 주인이 12년을 운영했고,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14년 전인 2012년 권세현(40) 대표가 사업을 맡으면서 방식도 무인으로 바꿨다.

"혼자서 일을 하다 보니 가게를 비울 때가 많았죠. 그래서 그냥 동전함을 두고 알아서 복사하고 가라고 해 놓았죠." 권 대표는 그래도 학생들이 거의 양심적으로 알아서 계산해 놓고 간다며 이 무인 방식을 선택한 것에 만족한다고 했다.

따로 계산해 보지는 않지만, 가끔 동전이 대폭 줄어드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무인 운영 방식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배달이 있어 가게를 비우고 왔는데 1천 원짜리 몇 장과 '복사 잘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란 쪽지가 놓여 있었어요. 괜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최 대표는 요즘 대학생들이 버릇이 없다느니 되바라졌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지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99% 이상이 양심적입니다. 복사 한 장에 50원인데 정확하게 계산해 주고 갑니다."

14년 동안 학생들의 복사 방식은 교재를 직접 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전부 컴퓨터를 이용해 복사가게에서 직접 인쇄하는 식으로 진화했다. 그래도 무인 거래 원칙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권 대표는 무인 운영 방식이 자기 같은 영세 복사업자를 살려 주었다고 웃었다. 듣고 보니 양심이 그랬다.

사진은 무인카페 입구에 있는 무인 농산물 판매장.
■양심이 귀하다

부산 기장군 장안읍 오리에는 '대룡마을'이 있다. '아트인오리'로 잘 알려진 예술인촌이다. 이곳에도 무인카페가 있다. 대룡마을에서 나고 자란 정동명(47) 조각가가 만든 카페다. 가게는 무인으로 운영된다.

벚꽃이 막 필 즈음 대룡마을을 찾아갔다. 예술인촌답게 카페 입구에선 마네킹으로 만든 조각상이 먼저 반긴다. 커다란 창고형 건물엔 '커피'라는 글자만 뚜렷하다.

"원래 창고였어요. 정 작가가 휴게 공간으로 쓰다가 친구들과 담소도 나누는 곳이었죠. 찾는 사람이 많아 2009년 카페로 만들었는데 돌볼 시간이 없어 무인으로 운영해요." 자칭 '청소부'로 자기를 소개한 정 작가의 부인 정유정(38) 씨가 말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냉장고 문을 열어 보고 부족한 것을 채우고, 아침과 저녁에 주변을 청소하는 것 말고는 카페에 투자하는 시간은 없단다. 커피도 냉장고의 음료도 손님이 알아서 먹고 입구에 있는 요금함에 넣으면 되는 방식이다.

이곳에는 무인카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 작가의 어머니 강경혜(74)가 운영하는 무인 농산물 판매대도 있다. 찾아간 날도 쑥과 돌미나리, 겨울초 등이 봉지째 놓여 있었다. 가격은 단돈 1천 원.

너무 싼 것 아니냐고 며느리 정 씨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세요. 야야, 천 원도 크다"고. 매일 10봉지 정도를 올려놓는데 어머니의 벌이가 꽤 쏠쏠하다는 것이 며느리의 판단이다.

요금통이 통째로 없어진 적도 있지만, 무인카페는 여전히 운영된다. "방문객들이 언제부터인가 쪽지를 적어요. 그리고 다음에 와서 자기 쪽지를 찾죠. 그래서 오래된 쪽지도 없애지 않고 보관해요." 무인카페 안에는 많은 사람이 남긴 흔적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2. 28일 현주랑 혁이랑 다녀가다. 조용하고 한적한 여기에 바람이 불어와 나무들이 소리를 낸다. 돼지♡현주' '수빈이네 가족은 이곳에 가끔 오면 너무 행복해요.' 
경남 김해 장척계곡 무인카페 '들풀마당' 차승열 사장.
■양심이 고맙다

증권사에 근무하던 차승열 씨는 11년 전 비교적 이른 나이인 48세에 명퇴를 했다. 경치 좋은 시골에서 식당이나 할까 하고 김해시 상동면 장척계곡 위에 작은 땅을 사서 우선 세를 놓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2007년 식당에 2층을 올려 펜션으로 바꿨지만 그 또한 신통찮았다. 그 뒤 집을 내내 비워 뒀다가 지난해 9월부터 무인카페 '들풀마당'을 열었다. 무인으로 운영하는 양심 카페를 시작하게 된 것은 부산 둔치도의 금빛노을 같은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공기가 좋아요. 도시처럼 인심도 각박하지 않고, 시골에 놀러 오는 분이 양심에 어긋날 리가 없죠." 차 대표는 단 한 채 있는 펜션을 관리하며 무인카페를 돌본다. 혹여 커피가 떨어졌는지 탁자가 더러운지 정도만 챙겨 볼 뿐이다. "양심에 기대는 무인카페가 가능했기에 새로 꿈을 꿀 수 있었죠. 양심이 고맙습니다." 들풀마당에 봄꽃이 환하다.
무인카페 '들풀마당' 온돌식 공간.
부산 반여동농산물도매시장에도 양심 채소가게가 있다. 이 시장은 주로 도매업을 전문으로 하는 시장이다. 하지만 과일과 채소가 싸다는 소문이 나서 일반 소비자도 많이 찾는 곳이다.

유경농산 설이증(44) 대표는 '1천 원의 행복'을 크게 써서 내걸고 소매도 하고 있다. 공식 이름인 동부청과 249번 중매인이라는 상호가 있지만 '행복 양심가게'라는 간판을 앞세운다.

설 씨는 2004년 단돈 20만 원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현재 연간 수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농산물, 식자재유통 회사로 성장해 반여동농산물도매시장에서는 꽤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물건만 있고 주인도 나타나지 않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오직 가격표와 꾸러미만 보고 설 씨의 과일과 채소를 사간다. 판매자와 소비자의 믿음이 이 일을 가능하게 했다.

무인 양심 가게는 의외성과 신비성이 더해져 사람의 눈길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다. 무인 가게에서는 스스로가 사장이고 주인이고 손님이 된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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