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니 탓이다, 니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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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언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한자 '뉘우칠 참(懺)' 자는 원래 중국말이 아니다. 중국인들이 불경을 번역하면서 범어(梵語) ksama를 음역해 참(懺)이라 쓰고 뜻으로 회(悔)를 덧붙여 불교 용어인 '참회'가 탄생했다. 초기 불가에서 비구들이 보름마다 모여 계율을 외우는 한편, 계율을 어긴 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부여한 것이 참회의 기원이니, 가톨릭에서 중요한 의례의 하나로 치는 고해성사와 같은 종교의식이라 할 것이다.

요즘 민족 시인으로 면모가 새롭게 부각되는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밤마다 손바닥 발바닥으로 거울을 닦으며 참회하는 자신의 모습을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이라 노래했다. 들뢰즈의 용어를 빌리자면 윤동주 시의 물적 횡단선은 시집 제목 그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이며, 영적 횡단선은 뉘우쳐도 다하지 않는 '부끄러움'이다. 고운 부끄러움이 늘 시정(詩情)에 촉촉이 젖어 있기에 그는 고뇌하는 식민지 청년을 넘어 우리 모두의 애틋한 연인으로 다가올 수 있었으리라.

남에 대한 비방 일삼는 철면피들
밥 먹듯 참회, 반찬 먹듯 죄지어
고운 부끄러움 간직하며 살아야

고해성사를 신자의 의무로 규정한 기독교가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서유럽에는 전통적으로 참회록, 혹은 고백록(Confession)이 산문의 중요 장르였으니, 아우구스티누스, 루소, 톨스토이의 작품을 3대 참회록이라고 한다. 이들의 고백에는 낯 뜨거운 구석이 많다. 철없는 젊은 시절에 저지른 성적 방종과 도덕적 일탈이 주된 줄거리인데 참회의 강도를 높이려다 보니 타락한 자신의 악행에 대한 묘사가 제법 리얼하다. 나쓰메 소세키는 자전적 소설 '나는 고양이다'에서 "자신이 추악한 악당이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아야만 비로소 인간이 된다"면서 "남자들은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자들의 7할 남짓에서 연정을 느낀다"고 했다. 아마 자신의 경험을 실토한 것 같은데 그 말이 맞는다면 어쩔 수 없이 모든 남자는 하루에도 수백 번 부정을 일삼는 탕아가 틀림없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도 햄릿의 입을 빌려 "인간의 두뇌란 망상으로 가득 찬 고름 덩어리"라고 저주를 퍼부었는가 보다.

중죄를 저지른 우리 악당들은 죽어서 어디로 갈까. 중세 말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그린 '최후의 심판'에 해답이 나온다. 과음과 과식을 일삼은 자들은 악마가 들이붓는 똥물을 끝없이 들이켜며, 탕녀는 음부를 휘감은 도마뱀 괴물에게 성고문을 당한다. 거짓말쟁이들은 혀를 뽑히고 고춧가루 가는 믹서 같은 기계에 말려 들어가 납작 오징어가 된다. 그 아래에는 물고기 괴물이 기다리고 있다가 토마토 반죽이 된 죄인들을 널름 잡아 잡순다. 아아, 사정이 이러니 우리가 참회하지 않고 배기랴.

하지만 참회를 밥 먹듯 하면서 반찬 먹듯 또 죄를 짓는 인간도 많다. 러시아의 광인 황제 이반 뇌제는 정적을 꿰미로 죽일 때마다 통곡하며 참회했지만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느냐며 마구 도끼를 휘둘렀다. 그가 참회를 위해 입었다는 거친 옷은 도로아미타불의 표상이다. 완전무결한 모범적 인간이라 칭송 받은 루소는 참회록에서 자신은 선천적 노출증 환자이자 마조히스트이며 도둑질과 거짓말을 밥 먹듯 한 악당이라고 천연덕스럽게 고백했는데, 당대의 지성 디드로는 "그는 자신을 부정하게 묘사하는 것을 통해 남들에 대한 비방을 진실처럼 들리게 만든 자"라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내 탓이오"라고 참회하는 척하면서 "니 탓이다!"라고 화살을 쏘아 대는 철면피가 바로 루소다.

그러나 우짜겠노. 어차피 불완전한 사람의 탈을 쓰고 생겨났으니 골방에서 가슴만 치지 말고 거리로 나서 또 한 번 죄를 짓고 윤동주의 시를 외우며 참회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 순결한 시인조차도 '또 태초의 아침'에서 봄이 오면 빨리 또 죄를 짓겠다고 읊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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