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가 열전] 2. '아트버스터' 산울림과 김창완
파격, 혁신, 창의성에 아이 같은 순수함으로 세대 초월
■'산울림둥이' 신조어까지
김창완이 동생 김창훈, 김창익과 함께 만든 그룹 '산울림'은 실제로 직업적인 록그룹이 되기 위해 앨범을 만든 건 아니다. 1972년께 집에 500원짜리 기타를 들고 와서 형제끼리 노래를 부른 것이 음악의 시작이었다.
김 씨 3형제 작곡한 150여 곡 모아
첫 앨범 만들다 그룹 '산울림'
탄생구어체 문장 '아니 벌써' 등 파격미
첫 공연 땐 관객 던진 꽃, 무대 덮어
1·2집 대박, 한 해 앨범 4장 발표
시정 넘치는 노래로 매력 여전
얼마 후 김창훈이 기타를 하나 더 장만하자 할 것이 없던 막내 김창익은 전화번호부와 노트 등을 방바닥에 놓고 드럼 흉내를 내면서 그들의 음악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1977년 대학을 졸업(서울대 농대 잠사학과)하면서 그동안 작곡했던 150여 곡이 아까워서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기분으로 그들은 앨범 한 장을 내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레코드 회사에서 녹음을 허락했고, 녹음 당일 취직시험이 있던 그는 과감히 녹음을 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산울림'의 탄생이었다. 록음악이 그다지 대중화되지 못한 1970년대 1집 '산울림 새노래모음'(1977)은 록 앨범으로서는 최초의 히트앨범이었고, 한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문제적 데뷔 앨범'으로 평가되고 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아니 벌써'와 '문 좀 열어줘', '불꽃놀이', '안타까운 마음' 등의 곡을 통하여 이들이 들려준 독특한 사운드, 생동감 넘치는 리듬, 신선한 멜로디 등은 당시로서는 하나의 문화충격이었다. 여기에 구어체 문장을 그대로 가사로 사용해 위트와 패러독스가 생동감 있게 표현된 노랫말 역시 우리 가요계 발전에 커다란 시금석이 되었다.
얼마 뒤 발표한 2집 '산울림 제2집'(1978)을 통해 프로그레시브와 헤비메탈까지 도입한 '산울림'의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행보는 대중적으로도 엄청난 호평을 받는다. 3분 25초에 달하는 베이스 기타의 기백을 보여준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헤비메탈 스타일에 보컬 하모니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노래 불러요' 등은 당시로서는 '산울림'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였다. 그해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열렸던 첫 공연은 새벽부터 장사진을 치는 소동과 관객들이 던진 꽃으로 무대가 뒤덮이는 난리통을 벌이는 등 많은 화제를 낳았다. 1977년생 아이는 당시 '산울림둥이'로 불렸을 정도이니 인기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대중적 성공으로 '프로'가 되다
1, 2집은 각각 50만 장에 달하는 공전의 히트를 거두었고 앨범 한 장만 내겠다는 당초의 계획은 수정되었다. 이러한 대중적 성공을 거두면서 '산울림'은 '프로'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동요와 옴니버스 앨범을 포함해 일년에 무려 앨범 네 장을 발표하는 위력시위를 한다. 상업적 참패를 맛본 그들의 '산울림 제3집'(1978)은 그들의 앨범 중 가장 실험정신이 충만한 앨범으로 한국 록 역사상 주목해 봐야 할 명작 중 하나다. 일본의 일부 평론가는 이 앨범의 곡들을 평하며 '산울림'을 우리나라 메탈의 효시로 보기도 했다. 연극, 영화, 드라마 등의 주제 음악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만든 편집앨범 '산울림 제4집'(1979)과 창훈과 창익의 입대 전에 기획해 놓았다가 두 동생들의 휴가 기간을 이용해 마무리 지은 '산울림 제5집'(1979)에는 김창완이 17세에 작곡한 '산울림'의 빼놓을 수 없는 명곡 중의 하나인 '왜! 가'가 수록되어 있다.
'산울림 제7집'(1981)은 조용필의 3집, 변진섭의 1집에 비견되는 셀 수 없는 히트 싱글이 연속적으로 포진되어 있다. 제대 후 돌아온 형제들의 연주도 물이 오를 대로 올랐으며 김창완만의 시정(詩情) 또한 거의 샘물과도 같이 흘러넘친다. '가지 마오'로 포문을 열면 '독백', '하얀 밤', '청춘', '노모', '하얀 달' 등 무수한 보물들이 연이어 차례를 기다린다. 이 앨범은 지금 필자와 같은 정서를 공유한 세대가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서한집(書翰集)인 것이다. 상업적 성공을 한 발짝 더 연장시킨 '산울림 제8집'(1982)의 히트곡 '내게 사랑은 너무 써'는 김창완을 러브 발라드의 히트메이커로 오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기비판 후에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산울림 제9집'(1983)은 김창완 스스로가 가장 애착해하는 역작이었지만 대중들은 이 앨범의 숨은 가치를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