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 앞에선 군림, 강자에겐 굽신… 그대 이름 '개+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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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저씨'로 본 우리 사회 혐오와 분노 사이

여성과 약자를 권위적으로 대하며 폭언을 하거나, 회식과 음주를 강권하는 무례한 중년 남성을 뜻하는 신조어 '개저씨'가 청년 세대와 여성들 사이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삽화=류지혜 기자 birdy@

드라마 '미생'의 등장인물 '마 부장'은 부하 여직원에게 "어디 여자가…"라는 폭언을 일삼는다. 때로는 당연하다는 듯 부하의 공을 가로채기도 한다. '마 부장'은 대표적인 '개저씨'다.

'개저씨'는 개와 아저씨의 합성어로 주로 여성이나 약자에게 갑질하는 중년 남성을 비하하는 신조어다. '개저씨'에 비해 '김치녀'는 훨씬 오래전부터 등장한 용어로, 한국 여성 전체를 낮춰보는 말이다. '개저씨'와 '김치녀', 요즘 청년은 왜 특정 성(性)과 계층을 혐오하는 용어를 만들고 사용하는 걸까.

가부장적 가치관 용인 속 성장
여성·약자에 갑질 '중년男' 지칭

"남성에 대한 여성 분노
기성세대 대한 청년 반발" 해석

혐오는 또 다른 혐오로 재생산
해결 열쇠는 '존중'과 '배려'

■'개저씨 머스트 다이'?

20~30대 여성이 모인 단체 카톡방. '개저씨'는 대화의 단골 소재다. "어우, 오늘 팀장이 또 개저씨 짓 했어. 자기가 책임지기 싫으니까 나한테 다 떠넘기는 거 있지", "나이 먹고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몰라, 집에서도 저러나? 개저씨들."

대중문화가 이걸 놓칠 리 없다. '미생'의 마 부장뿐만 아니라 중년 남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개저씨' 캐릭터가 곳곳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네이버 인기 웹툰 '마스크걸'에는 과장이 부하 여직원에게 "어디 등산 갈 것도 아니면서…상순 씨도 좀 여성스럽게 입어봐. 여기 아름 씨 봐. 얼마나 보기 좋아. 아주 등산복이 유니폼이구먼?" 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형적인 '개저씨'다.

심지어 'Gaejeossi Must Die(개저씨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라는 영문 칼럼도 등장했다. 지난해 12월 한국 관련 정보를 다루는 영문 사이트 '코리아 엑스포제'에 실렸다. 스탠퍼드대 박사 출신이자 이 사이트 편집장인 구세웅 씨는 칼럼에서 한국 사회의 '개저씨' 현상을 분석했다.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모로부터 대접받고 자란 소년은 '개저씨'가 될 숙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군대에서는 마초 문화를 주입받고, 사회에서는 가장으로서 책임이 지워진다"며 "하지만 역설적으로 부양할 아내와 아이가 있는 '가장'이라는 점 때문에 지금까지는 한국 사회에서 가부장적이고 타인에 대해 배려심이 적은 '개저씨' 행태를 사회적으로 용인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가상 결혼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방송인 김숙 씨는 '개저씨'를 비꼰 발언으로 인기를 끈다. 이름하여 '가모장적 폭언'으로 네티즌 사이에서 '갓숙(God+숙)'으로 불린다. "남자가 조신하게 입고 다녀야지", "남편이 웃고 있어야 집에 들어올 맛이 나지", "남자가 아침부터 재수 없게", "여자가 하는 일에 토를 너무 달아" 등 김 씨가 방송에서 한 말이 어록처럼 돌아다닌다. 그동안 가부장적 사회에서 억눌렸던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조차도 '시원하다'는 반응이다. 김 씨는 이처럼 기존 성 역할을 전복시키는 '사이다 캐릭터'로 예능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혐오와 분노 사이

하지만 '개저씨'는 여성 비하 용어들에 비하면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다. 명품을 좋아하는 여성을 비하하는 '된장녀'부터, 남자를 볼 때 조건을 따지는 여성을 가리키는 '김치녀', 운전에 능숙하지 못한 중년 여성을 비꼬는 '김 여사', 아이를 키우며 민폐를 끼치는 여성을 낮추보는 '맘충(mom+蟲)'이 대표적이다. 남성을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단어가 중년이라는 특정 계층을 이르는 '개저씨' 정도라면, 여성을 깎아내리는 단어는 세대·계층별로 다양한 셈이다.

김홍미리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는 "'김치녀'와 '맘충'이라는 단어에 여성 혐오의 정서가 깔렸다면 '개저씨'에는 중년 남성에 대한 분노가 담겼다"면서 "강자는 약자를 혐오할 수 있지만, 약자는 강자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아직 남성의 지위가 여성의 지위보다 높다는 점에서 남성을 강자로, 여성을 약자로 분석했다. 김 활동가는 지난해 11월 부산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한 활동가 역량 강화 교육에서 '된장녀에서 맘충까지: 여성혐오 까발리기'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개저씨'라는 단어의 등장은 기성세대에 대한 청년 세대의 반발이라는 의견도 있다. 부산대 김희재(사회학과) 교수는 "'개저씨'는 남성에 대한 비하이기도 하지만 개저씨로 대표되는 세대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며 "중년 남성이 사회적 자본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데도 타인에 대한 존중은 부족한 부분에 대한 반발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또 김 교수는 "사회가 변함에 따라 남성이 예전에 가지고 있던 사회적 지위를 점점 잃어가면서 예전에는 덮어뒀지만, 지위에 맞는 행위를 못하고 있는 중년 세대에 대한 혐오가 드러난 현상이다"고 덧붙였다.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는다. '일베(남성 우월주의 사이트)'가 '메갈리안(일베에 반발해 탄생한 여성주의 사이트)'을 낳고, '김치녀'라는 단어가 '한남충(한국 남자+蟲)'과 '씹치남(씹+김치남)' 탄생에 일조했다.

하지만 청년들의 혐오와 분노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만약 중년의 당신이 개저씨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이 광고 문구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떨까. "좋아하는 것을 해 줄 때보다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을 때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조영미 기자 mia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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