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2월은 쉬세요
/김성언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1960년대 그리스 군사독재에 맞선 투사이자 세계적 배우 멜리나 메르쿠리가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던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 원래 '피레우스의 아이들'이란 향토색 짙은 내용의 주제가를 미국 가수 코니 프랜시스가 엉뚱하게 개작해 불렀는데 이게 코리아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다. 올드팬이라면 영화는 몰라도 곡만 들으면 "아하! 그 노래"하고 무릎을 치시리라. "월욜 화욜 수욜 목욜 금욜 토욜 다 키스해도 되지만 일요일은 안 돼요. 나도 쉬어야 하는 날이니까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번창한 직업여성분들의 주제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아무리 천대 받는 직업일지라도 일주일에 하루쯤은 꽃향기도 맡고 아크로폴리스 음악회도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인간적인 항변이 느껴진다. 원래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매춘업에 종사하면서도 '희랍인 조르바'처럼 푸르른 에게 바다를 닮은 밝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그려지니, 개작 가사라도 뭐 그리 나쁘지는 않다. 그렇다, 일요일은 누구라도 쉬어야 한다!
옛 농경사회에서 2월은 곧 다가올 봄의 뼈 빠질 노동에 대비해 푹 쉬는 달이었다. 정학유의 '농가월령가'를 보면 각 달마다 농부의 일거리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만 입춘과 우수가 버티고 있는 이달만큼은 즐겁게 놀고 맛난 술과 음식을 양껏 들라고 권한다. 농부 두엄내기나 며느리 소국주(小麴酒) 담그는 일 정도만 하면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그냥 랄랄라다. 서양의 2월, February는 원래 고대사회에서 정화(淨化)의 신으로 모시던 Februs에서 유래했는데, 로마인이나 게르만족들은 그달에 몸을 깨끗이 씻고 봄을 맞이할 축제를 벌였다. 겨울을 상징하는 악마들이 갖가지 분탕질을 하다가 불세례를 받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하는 세리머니가 축제의 절정인데, 우리 액막이 불제나 몸씻이 계욕과 원형이 동일하다. 동서양 공히 영주나 지주가 그 기간만큼은 농노의 도덕적 일탈을 눈감아 주고 넉넉히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도 똑같다.
동서양 모두 2월은 '푹 쉬는 달'
쉬는 데는 게으름만 한 것 없어
평화의 동의어는 게으름·지루함
쉬는 데는 게으름만 한 것이 없다. 연차까지 내서 연휴가 열흘 생겼으니 미루었던 가족에 대한 애정을 한껏 표시한답시고 천지를 싸돌아다니다간 초주검이 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서양에선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연휴 이후 사망률이 배나 증가했다는 풍문도 있다. 게으름은 도약을 위해 잔뜩 웅크린 개구리이자 발사를 위해 팽팽히 당긴 활시위다. 합리주의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나의 모든 사유는 난로 속의 잠에서 나왔다"고 고백했다. 하루 10시간 이상을 자는 데 소비했던 그는 잠 속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중얼거렸으며, 우주의 자연현상을 설명할 해석기하학의 공식을 잠 속에서 궁리하고 발명했다. 북국 스웨덴에서 폐렴으로 일찍 생을 마감했는데,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가 새벽부터 강의를 재촉했던 비극적 결과였다.
부지런은 분명 노동으로 목숨을 이어 가야 할 인간으로서 아로새겨야 할 덕목이긴 하지만, 사람의 본성에 대한 이해와 자연에 대한 배려가 없는 부지런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끔찍한 전쟁 주범 히틀러, 무솔리니, 도조 히데키는 엄청 부지런한 데다 게으른 인간은 절대 못 봐주는 성격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에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내건 것을 보아도 알조다. 사실 평화는 지루함이나 게으름과 동의어다. 제대로 지루함을 즐기지 못하고 꼭 유의미한 일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좀 무섭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크게는 수소탄을 만들지도 모르고 작게는 제2의 청춘을 구가한답시고 마구 휘젓고 다니다가 낙상해 병원에 위문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분은 병문안 안 가면 삼강오륜도 모르는 게으른 상놈이라고 흠씬 욕을 퍼부을 것이니 더욱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