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의 시네아트] '캐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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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리고, 설렌다 두 여자가 이 영화가

더쿱 제공

'첫 눈에 반한다.' 상투적인 문장이다. 이 진부한 표현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단순하게 말해 좋은 이야기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표현들에 생기를 불어 넣는 과정이다. 소설이라면 긴 문장으로 미처 채워 넣지 못한 감정들을 부연할 수 있다. 좋은 영화라면 그 빛나는 순간들을 화면으로 재현하고 체현시켜야 한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아픔을 삭이는 순간, 두려움을 딛고 또 한 번 사랑에 뛰어드는 순간 등 말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은 그 짧은 순간의 기적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을 재해석한 '캐롤'은 '20세기 에드가엘런 포'라는 평가를 받았던 스릴러 대가의 유일한 로맨스 소설이다. 다만 1950년대, 동성애가 마치 범죄처럼 혐오받던 시절을 배경으로 여자와 또 다른 여인의 사랑을 그린다는 점이 이 익숙한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든다.

1950년대 뉴욕, 맨하튼 백화점 점원 테레즈(루니 마라)는 손님으로 찾아온 캐롤(케이트 블란쳇)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다. 상류층 여성인 캐롤은 이혼을 앞두고 있지만 하나 뿐인 딸을 잃을까 불안에 시달린다. 반면 테레즈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20대 여성이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가 있지만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안한 테레즈에게 캐롤은 알 수 없는 매혹과 동경의 대상이다. 서로에게 쉴 곳을 찾으며 자연스레 가까워지는 두 사람. 세상은 그런 그녀들을 질시의 눈초리로 바라보지만 캐롤과 테레즈는 해방감을 느끼며 둘만의 여행을 떠난다.

동성애라는 소재에 눈길을 빼앗기기 쉽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파 프롬 헤븐'(2002)을 통해 이미 멜로 드라마의 정수를 재현해낸 바 있는 토드 헤인즈 감독은 다시 한 번 멜로 드라마가 무엇인지 증명한다. 캐롤과 테레즈 사이에 놓인 장벽은 남다른 면이 있긴 하지만, 핵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불가항력에 가까운 감정으로 서로에게 이끌린다는 점이다. 장애가 제시되고, 그것을 돌파하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 결국 멜로 드라마의 전부다. 이 때 '서로에게 끌린다'는 모호하고 식상한 감정을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이 장르의 모든 게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캐롤'은 지켜보는 사람마저 설레게 만드는 그 순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끌림과 설렘의 환상적인 이중주가 살짝 가려진 화면들 사이로 우아한 실크벨벳처럼 관객을 유혹하는 것이다. 두 배우의 완벽에 가까운 연기는 물론 1950년대 뉴욕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구현해낸 세트와 미술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16㎜필름으로 촬영해 디지털로 변환하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그 아련한 질감을 되살렸다. 게다가 마지막 순간 캐롤의 눈빛과 표정은 아마도 올해 최고의 엔딩이 될지도 모르겠다. 테레즈가 캐롤에게 첫 눈에 반한 것처럼 2시간 내내 빠져든다는 건 이런 것이다. 2월4일 개봉. 


송경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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