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흔든 한 권] 소설의 모든 것, '개종'과도 같은 전환점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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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 귀스타브 플로베르

처음엔 그 책이 왜 좋은지 몰랐다. 한 페이지를 읽는 데도 몇 시간씩 고투해야 했고, 시험 때에는 통째로 외워야 했고, 정신을 집중해 낭독을 듣고 또박또박 써내야 했다. 대학 3학년 봄에서 여름까지 소설 전공 강독 수업은 그렇게 지독하게 흘러갔다.

세월이 지난 뒤 다시 그 책을 펼쳐 보리라고, 소설을 쓸 때마다 숨을 쉬듯 함께하리라고 그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인생을 알기도 전에 만나서, 벅찬 감동은커녕 부담만 느끼다 시나브로 멀어지는 작품들이 있다.

조이스의 '율리시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카뮈의 '이방인',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같은 필독서들이다. 소설들이 누군가의 영혼을 사로잡고, 생(生)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는 데에는 개종(改宗)과도 같은 전환점이 필요하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가 나에게는 그러했다.

내가 불문학도가 된 것은 전적으로 자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타의적인 것도 아니었다. 자의 반 타의 반, 타협에 의해 불문과에 입학했다. 1년 동안 마음이 딴 데 가 있었다.

1년 후, 나도 모르게 마음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읽은 뒤였다. 1년 뒤, '마담 보바리'를 원서로 만났다. 그리고 잊었다. 플로베르도, 그의 대단한 '보바리 부인'도 깨끗이 잊어버렸다. 무슨 조홧속인지 몇 년 뒤, 소설을 썼고, 소설가가 되었다. 김윤식의 소설 월평을 읽고, 한국 소설들을 읽기 시작한 뒤였다.

그리고 '마담 보바리'를 다시 만났다. 누렇게 변색된 책장을 펼쳐보면서 깜짝 놀랐다. 문장에 대하여, 인물에 대하여, 화법에 대하여, 스타일에 대하여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내 글씨가 분명한데도 귀신이 써 놓은 것처럼 친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소설가가 된 후, 새 작품을 쓸 때마다 고심하는 내용들, 소설의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다.

현대소설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이 소설은 샤를 보바리와 결혼한 엠마라는 여자의 욕망과 파멸을 다룬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춘기 시절, 파리 귀부인들이 주인공들인 연애소설들을 탐독하며 그녀들과 같은 삶을 꿈꾸었던 엠마의 과도한 욕망이 초래한 가정 비극 사건이 골자이다.

플로베르는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게 마련인 불륜이라는 통속적인 소재로 독보적인 스타일(문체)을 창조함으로써 소설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설 쓰는 일이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지만, 소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황홀한 순간이 있다. '마담 보바리'를 펼쳐볼 때이다. 문학(소설)이라는 종교로 개종하면서 생긴 일이다.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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