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신춘문예-평론] 급진론자의 커밍아웃 - '인간중독' / 이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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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1. 긴 서론: 분열과 왕토사상



까고 말하자. 약하면 진다. 진다는 건 분열된다는 건데, 굳이 들뢰즈까지 들먹일 필요가 있을까. 강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따라 행동이 바뀌지 않는다. 약한 사람들은 자기보다 강한 사람이 나타나면 자신을 수정해야 된다. 지겹게 말꼬리를 따라다니는 '습니다', 비굴하게 웃어야 하는 감정의 거짓말, 심지어 사상까지. 실제 내면에서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 그것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양상이 곧 현실이다, 그 이상은 없다, 아쉽게도.

하지만 현실은 현실일 뿐 전체는 아니다. 세상이라는 건 언제나 체제보다 넓은 거니까. 반체제인사들도 세상에 있다. 그들이라고 해서 영혼으로 이곳에 기거하는 존재들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궁금한 것 하나, 대체 어떻게 체제의 바깥에서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걸까?

궁하면 통한다! 길을 잃은 생각들은 우리의 읽는 책들 속으로, 우리가 쓰는 글들 속으로, 그리고 마음속에 고여 들어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분열된다. 현실을 살아가는 나와 현실에 치를 떠는 나가 옹기종기 모여 별 탈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대부분은 여기에서 멈추고, 실은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지금 당장, 나는 이제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말투를 쓰겠다고 선언한 뒤에 학교 선생님, 교수님, 직장 상사, 아니면 그냥 아무나 어른한테 반말을 써보시라. 솔직함이 가장 큰 미덕이니 친구 장례식에 가서 밥 먹기 싫으니까 빵 내어 놓으라고 소리쳐 보라. 당장에 미친 놈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와 어른을 구별해서 이야기 할 줄 알고, 힘 센 놈한테는 고개 숙일 줄 알고, 사회적인 합의에는 홀린 듯 당연하게 여기며 산산이 쪼개질 줄 아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이 되는 지름길이다.

유학사상은 이런 전제 하에서 체제 완결적으로 완벽한 이론이다. 정치적 지도자인 천자를 위계질서의 가장 위에 두고서 톱니바퀴처럼 그 밑으로 신하들이 천자를 보좌하고 그 신하들을 밑의 계층이 보좌하고……. 이 권력 구조의 흐름은 윗분들에서 아랫것들에게까지 범람해서 마을의 어르신들을 기준으로 다시 질서가 짜이고, 결국에는 밥 하나를 먹어도 가정의 어른인 아버지에게는 독상이 차려지는 것이 된다. 양놈들은 꿈도 못 꿀 세상 아닌가. 하지만 이 일사불란한 체제는 치명적인 약점을 두 가지 가지고 있다.

첫째는 아예 시민사회라는 개념이 성립할 여지가 없다 보니 윗물이 흐리면 그걸로 끝이 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만 떨어지고 민중 계층의 자생적인 자성의 역류가 발휘될 증기기관이 없는 것이다. 굳이 역성혁명까지 가지 않아도 언로가 있으면 충분하겠지만, 제일 위에 있는 누군가가 귀를 대지 않는 이상 그런 언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것의 결정권이 정치권력의 우두머리에게 있다. 유학에서 '인의예지'가 그토록 강조되는 것은 아마도 이런 단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윤활유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가 않는다. 한 두 사람의 성군으로 세계를 유지하기에 인간은 한계가 있지 않는가. 아쉽지만 세상 임금 중에 세종만 있을 수는 없다. 질서가 먹혀드는 선 아래에서는 기가 막히게 정돈된 체제이지만 조금만 삐끗하면 정돈된 체제를 따라 탁한 물이 얼마든지 흘러 들어갈 수가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만큼 더 심한 것도 없다. 왕이 무려 '천자天子'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것이, 즉 권력의 분배라는 문제가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기는 해도 그러하고 해서 기껏해야 사회의 여러 가지 분야 중 하나인 정치에서 1등을 찍은 사람의 생각 그 자체가 '하늘의 질서'가 되는 건 아무래도 말이 맞지 않다. 같은 인간인데 말이다. 세계미용사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그가 천자가 되지는 않는다. 본질적으로는 통치자라는 것도 직업의 한 종류다. 직업인으로서 누릴 영광은 누리되, 그의 말이 신神의 말이 된다는 게 '천리'에 맞을 리가 없지 않는가. 유학은 여기서 길이 막히기 때문에, 억압적으로 변하기 쉽다, 애초에 납득시킬 수가 없으니 힘으로 밀어 붙여야 되는 거다. 즉 체제가 곧 세상이 되기 쉽다. 아니면 종교적인 믿음으로 일부러 통치자의 권위를 천자로까지 올려다놓아야 한다. 유학과 유교라는 말이 종종 번갈아 쓰이는 건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학문이지만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보아야 맞는 말이 된다. 그래서 곰곰이 그 맛을 음미하다보면 이상세계가 펼쳐지는 듯한 기분을 가지게 되지만 그 사이에 도끼자루가 썩어 사회도, 또 그 속의 구성원들의 마음도 문드러지기 좋다.

이쯤 되면 대체 영화이야기는 언제할 건가 궁금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보자. 찬찬히 마음의 매듭을 풀지 않으면 김대우 감독의 영화세계를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을 그만 놓치기 쉽다. '음란서생'이 생각보다 야하지 않다고 푸념하는 댓글을 본 적이 있는데, 오해 없이 그런 분들은 바로 에로 영화를 선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이 유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도출되는 결론이 하나 있는데, 바로 왕토사상이다. 황제는 곧 천자인데, 천자 말고 땅을 가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즉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모든 것의 소유는 황제의 것이고 아랫사람들이 무언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다 황제의 '인덕' 덕분이다. 시혜는 있어도 소유는 없다.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것 자체가 반역이다.

즉 유교국가의 '실정법' 하에서는 본질적으로 왕의 허락 없이 무언가를 가질 수 없다. '원래' 내 것이어도 세상의 질서가 들이닥쳐 그런 소유는 없다고 말한다. 보통 실정법으로 해결이 안 되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자연법'을 끌어오게 되는데 유교국가에서는 그 말이 맞지 않게 된다, 왜냐면 실정법의 우두머리의 말이 곧 하늘의 이치, 자연법이 되기 때문이다. 뭔가 아닌데, 하는 자각은 세상 속에 있는 주체를 분열시킨다. 역시 굳이 들뢰즈까지 가지 않아도 당연한 현상이다. 체제는 기가 막히게 좁고 주체는 깨지고 망가져야 체제에 발붙이고 살 수 있다. 분열이 정상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김대우 감독의 '음란서생'(2006), '방자전'(2010), '인간중독'(2014) 의 월드컵 개최년도를 따라가는 듯 개봉된 일련의 영화 세 편에서는 바로 이 분열과 대치하면서 성장하는 일련의 의식흐름이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사랑' 이야기에 가까워 보이는 영화들에서 어떻게 그런 과정을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면 바로 그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방법은 간단하다. 사랑하는 여자를 영토로 보면 된다. 김대우 감독의 영화들 속 남자 주인공들은 모두 실정법이 허용하지 않는 사랑, 즉 왕이 내어주지 않는 영토를 가지려고 한다.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그 영토를 갖기 위해 자기를 내던지는 남자의 이야기이니, 성감수성의 문제에서 그래도 굵직한 오류들은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쭉 이야기를 펼쳐나가 보겠다. 특히 '인간중독'에 이르러 등장하는 급진적인 문제의식에 대해서 중요하게 언급하면서.

실정법상 가질 수 없는 영토. 그 영토를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행동에 질서가 가하는 형벌은 무엇일까. 김대우 감독은 은근슬쩍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한다. 아니다, 사랑의 속성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사랑이란 게 지금 다른 쪽에 있는 상대를 자기의 질서로 끌어들이려는 노력 아닌가.



2. 첫 번째 방법론: "꿈꾸는 거 같은 거……, 꿈에서 본 거 같은 거……" - '음란서생'



명망 높은 사대부 집안의 자제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김윤서(한석규 역)는 명망 높은 사대부 집안의 자제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기 때문에 이리저리 시달린다. 그의 동생은 당파싸움에 휩쓸려 고초를 당하고 오는데, 일단 가족들이 성화다. 왜냐하면 그가 '가만히' 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이순재 역) 그에게 상소를 올리라고 하지만 그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의 붓은 '상소'라는 형식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헤비메탈을 하는 사람에게 랩을 하라고 하면 당연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비슷비슷해 보이는 글도 막상 안으로 파고 들어가면 일정한 노선이 있음을 알게 된다. 오히려 그의 붓은 음란소설이라는 형식 안에서 물 만난 듯이 움직인다.

포르노와 007영화의 공통점이라면 주인공들이 엄청나게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점이 그 우선이고 또 하나는 부모가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음란소설에서는 부모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건 하나의 규칙이다. 부모가 보는 앞에서 성행위를 할 정신 나간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다시 말하면, 이것이 바로 김윤서의 본성에 관한 힌트다. 그는 아버지-왕-황제로 이어지는 현재의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 위의 질서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비로소 '살맛'을 느끼는 사람에 가깝다.

당파싸움이라는 것이 말이야 법도를 논하지만 실상은 사사로운 권력싸움 아닌가. 아버지의 성화도, 아내의 불만도 그 감정 자체를 무시할 것은 아니지만 그 감정이 가장 최선의 가치는 아니다. 김윤서가 자기 동생이 참화를 당했음에도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은 그가 왕을 섬기는 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왕이 아닌 그 위의 질서를 따르는 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는 무감한 것이 아니라, 그 상위질서에 따라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감정이 상하지 않는다. 가족들의 성화가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든 것이라고나 할까.

다시 말하면 언제든 이런 종류의 사람에게는 자신의 삶이 파멸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일견 차분해 보이고 정돈되어 보이는 이 같아도, 자신이 지키고 있는 상위질서와 반대편에서 거울로 비추고 있는 하위질서(왕이 곧 법이 되는 세계)가 안정되게 서로를 비출 때에, 이 다행스러운 상호오해 덕분에 갈등이 없어 보이는 것이지, 만약 하위질서보다 기본적으로 크기가 큰 상위질서의 거울에 들어찰 만큼 자아의 상이 비춰지는 순간 끔직한 상황이 벌어진다. 상위질서에는 다 담겨지는 그의 자아가 하위질서의 거울에서는 그의 목까지만 비추고 마는 것이다. 그의 머리는 있지만 있지 않는 것이 된다. 하위질서의 거울이 이 모순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 목을 치거나 다리를 잘라야 세계 간의 불화가 사라질 텐데.

어쨌거나 허리를 약간 굽히면 만사가 해결된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양쪽의 거울도 일그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원하는 것이 상위질서의 거울 맨 꼭대기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자아를 다 드러내야 하는 거라면?

정빈(김민정 역)은 왕의 여자다. 여기서는 왕의 영토라고 표현해보자. 왕의 입장에서야 천인공노할 노릇이지만 사실 왕이 별거인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맺어지는 것이 정상이고 가장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사랑에 따라서 행동해도 되는 것이 허락되는 상위질서의 거울 속에서 정빈은 김윤서의 영토여야 한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죽는다. 프로이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발견하고 또 만들어 내면서 혹시 이것 너무 관념적인 것 아닐까 스스로 의문을 가졌을 지 모르겠지만, 그럴 필요 없다. 자기보다 위에 있는 남자의 여자를 탐한 것이 확인되는 순간, 왕(안내상 역)은 김윤서에게 거세의 형벌을 내리려고 한다. 관념이 아니다. 현실이다. 왕의 영토를 건드리면 거세당한다.

그런 두려움이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김윤서의 '소유화 과정'은 실제보다 음란 소설 속에서 훨씬 더 생생하게 진행된다. 그리고 그 덕분에 김윤서의 숨통이 트인다. 극 초반 사실상 감정표현이 없던 김윤서와 자랑스럽게 '음부' 운운하며 입가에 띤 미소의 대비를 보라. 어느 쪽이 더 사람 같은 지는 표정만 봐도 안다. 현실의 질서는 감정을 앗아간다. 세상이 좁으면, 실제의 자신보다 자아가 좁게 설정되면 감정부터 축출 당한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나마 그의 자아는 그의 실제에 가까워지고 그는 사라진 감정을 회복한다. 그는 화도 내고, 웃기도 하고, 사고도 치며, 치기도 부리고, 그리고 사랑을 한다.

재밌는 건 가문의 질서라는 좁은 세계 속에서는 자기의 동생을 건드린 숙적인 의금부 도사 광헌(이범수 역)이 음란소설의 제작이라는 더 넓은 세계에서는 필자와 삽화가라는 협력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적이어야 했던 걸까? 하지만 김윤서의 질문은 여기까지 가지 않는다. 그는, 이제 막 하위질서와 자신의 모순에 눈을 뜬 사람이니까.

정빈을 대하는 태도 또한 다분히 유치한데, 이미 거세된 조내시(김뢰하 역)에게 은근히 자기의 성기가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그녀에게 다가가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른스럽진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그녀라는 영토에 대해 분명한 자기 선언을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즐거움으로 시작된 일련의 행동들이 결국에는 하위질서의 거울 끄트머리를 뚫고 나오고 끝내 그는 제거되어야 할 운명에 처한다. 그리고 주의 깊게 볼 지점 중 하나는 그가 영화의 결말에 가서도 정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분명히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놀라운 말을 한다. 그가 갈등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 안의 사랑과 음흉한 마음 어느 쪽이 진짜 마음인지 몰라 차마 정빈에게 다가서지 못했다고.

그런데 꼭 에로스적 사랑을 논하지 않더라도 실은 그 마음은 같은 마음이거나, 적어도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쪼개지고 분열되어 있는 상황 자체가 이상한 것이지만 역시나 김윤서는 거기까지는 가지 못한다. 물론 그 마음이 가진 숭고한 뜻 자체가 사라지는 것 아니다. 그는 정빈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아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방자전' '인간중독'에서도 근본적으로 남자 주인공들은 여자 주인공들에게 해를 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주어버리고 또 주어버리고 싶어할 뿐. 하지만 김윤서는 아직 좀 어정쩡하다. 자기의 영토를 경작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정도이니, 그 성품이야 뭐라 할 것이 아니지만 상대는 만만치가 않다. 그는 거울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는 세상에 있지만 체제 속에 있지 않다. 이마에는 '음란'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그는 열외가 된다. 물론 그는 여전히 개기며 야한 것들을 그리지만. 더 넓은 세계의 공간 속에서 그의 생각은 살아 숨쉬고 있지만.

자, 이제 1회전이 끝났다. 성과는 여태껏 자기 자신의 의식 상태를 정확히 모르고 있던 자가 숨어있던 스스로를 눈치 채기 시작한 것. 하지만 아직 멀었다. 실제로 그 영토를 차지하진 못하지 않았는가. 다음 단계로 가야 한다.



3. 두 번째 방법론: "안 되겠어, 가져야겠어." - '방자전'



'방자전'의 도입부는 아무리 봐도 음란서생의 김윤서와 행색이 비슷한 색안경(공형진 역)이 소설의 소재로 삼기위해 방자(김주혁 역)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에서 출발한다. 신분상의 마지노선만 아니라면 실질적으로는 양반인 색안경이 하인 출신으로 장안 제일의 건달이 된 방자에게 한 수 배우는 모습이 되는데 이건 마치 자기 자신의 틀로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류층 필자가 좀 더 획기적인 이야기를 건지기 위해서 하위층의 이야기를 흡수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역시 들뢰즈가 옳긴 옳았던 건지, 사회의 외곽에 있는 자들이 오히려 시대의 새로운 정신을 품고 있는 게 맞는가 보다.

그도 그럴 것이 김윤서는 여전히 아내가 떠온 세숫대야에 얌전히 세수를 하는 자로서 음부니 뭐니 신나게 떠들어대지만 생활의 측면에서는 숨 막히는 질서에 자연스레 적응해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감히 왕의 아내를 품는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반항을 하지만 그녀를 안고 도망을 간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는 왕의 영토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지만 그는 그러지 않는다. 하지만 방자는 다르다.

자신의 주인인 양반 이몽룡(류승범 역)이 노리는 여자를 품는 방자의 모습을 보라. 그는 춘향(조여정 역)의 젖가슴을 터질 듯이 그러잡으며 "안 되겠어, 가져야겠어."라고 말한다. 방자는 글을 읽을 수 없다. 그러니 상상 속에서 경작할 수가 없다. 세련된 방식으로 욕망을 풀어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가지거나 혹은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는 상놈이기 때문에 들키면 맞아죽는 것을 각오하고서, 춘향의 처소에 몰래 들어와 그녀를 '가진다.' 인간으로서의 정욕과 사회의 모순에 대한 분명한 자기 선언이, 다시 말하자면 가장 밑바닥에서의 육체에서부터 가장 상위에서의 철학적인 태도가 모순되지 않고 정확히 일치되는 순간이다. 이 순간 그는 조금도 분열되지 않는다. 몸이, 표정이, 행동이, 생각이, 쪼개지지 않고 완벽하게 일치해 있다. 김윤서가 글로서 성취해 낸 것을 방자는 몸으로 해낸다. 김윤서는 소유하는 것을 상상하지만 방자는 소유한다, 소유하려 한다. 하룻밤이긴 해도 보기 좋게 질서는 전복되고 '사랑하는 이들은 실제로 서로를 사랑한다.'라는 이 간단하지만 도무지 지켜지기 어려운 원칙이 깨지지 않는 상위질서의 세계가 나타난다. 욕망은 그릇된 걸까. 글쎄,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하위질서의 거울은 좁다. 권력구조의 특성이기도 하겠지만 가정에서부터 왕까지 연결되는 것으로 이론 구성이 되어있는 유학사회의 특성상 양반의 여자를 건드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왕을 건드린 것이 되고 왕을 건드렸다는 것은 하위질서의 거울 바깥의 일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체제완결적인 유학사회의 거울은 그런 상황을 수용해 낼 수가 없다. 일신론에서 신이 둘 있는 것이 그 자체로 모순이 되는 것과 같다. 자, 이제 하위질서의 틀에 맞게 사건에 대해 형벌을 가할 필요가 있겠다. 그러면 말이 맞지 않는가.

결국 방자가 어렵사리 획득한 그의 영토, 춘향은 몽룡의 손에 의해, 길게 보면 보이지 않는 왕의 손에 의해 계곡 아래로 떨어지고 어린 아이처럼 되어버린다. 영토를 가지려 한 방자의 시도는 그 땅이 황폐화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그리고 '방자전' 또한 여기에서 멈춘다. 영화의 끝에 가서야 '방자전'이라는 영화타이틀이 뜨는 것처럼 마음만 주인공이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방자는 결국 한발 물러선 모양새가 되고 만다.

물론 방자 탓을 하는 게 아니다. 말이 쉬워서 체제에 반항한다는 것이지 목숨을 건다는 게 쉬운 일인가. 게다가, 극의 초반부 어딘가 어설프고 서투른 방자의 모습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듯이 김대우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가지는 묘하게 안쓰러운 기운은 사랑이라는 것만 아니라면, 그들이 원래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데 있다. 상위질서의 반듯함을 잘 지켜낼 줄 아는 김윤서는 정빈의 그 호기심어린 당돌한 순수함에 매료되지만 않았더라면 여전히 '온순한' 사람으로서 왕과 호흡을 잘 맞추어 조용히 살아갈 수 있을 사람이다. 누구를 해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는 방자의 그 선함은 또 어떤가. 그가 향단(류현경 역)을 사랑했더라면 그는 아마 세상에 부딪힐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날선 표정을 짓는 순간은 서울에서 돌아온 몽룡에게 춘향을 건들지 말라고 위협할 때 정도뿐이고 보통은 순응하고 필요할 땐 읍소한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인간중독'에서의 김진평(송승헌 역) 또한 "아랫사람한테 참 잘해주셨는데." 하는 말을 들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한다. 탐미적인 태도가 언뜻언뜻 보이는 김대우 감독들의 영화들 속에서 그 아름다운 배경들이 바로 아름답기 때문에 서글퍼 보이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사랑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기도 하겠고 혹은 무서운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냥 사랑하려는 것뿐인데 온갖 세상의 모순들이 달라붙어 끝내 사람을 조각내고 만다. 그래도 사랑해야 하는 걸까. 아마도 김대우 감독은 "그렇다" 라고 대답하는 것 같지만.

그래, 사랑이기 때문이다. 영토를 갖기 위해서다. 참 이상하지 않는가. 그 영토를 갖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 봤다. 양반에게 무릎 꿇고 빌어도 보았다. 그런데도 마치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당연히' 하위질서의 거울은 그 로맨티시스트들을 바깥으로 쫓아낸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생각만 해도 쫓아내고 소유를 해도 쫓아낸다. 어떻게 하면 나는 온전히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걸까.

그래, 방법이 있다. 하위질서의 거울을 치워버리면 된다. 급진론이다.



4. 세 번째 방법론: "만나면 되잖아." - '인간중독'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하게 하위질서가 던져주는 과제들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김진평 대령은 겉만 멀쩡하고 각종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다. '갑자기 혼란스러운 느낌을 받으며 떨림을 느끼거나, 주변 상황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과 같은 증상을 의미한다.' 무엇의 정의 같은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섬망이라는 정신질환에 대한 정의이지만 사랑으로 바꿔서 읽어도 실은 별 차이가 없다. 김진평의 진료기록을 감기몸살로 위조하는 군의관(이승준 역)은 이렇게 말한다. 공황장애까지는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고 쳐도, 섬망은 위험하다고.

그래, 맞다. 섬망은, 사랑의 대체어라 할 수 있는 이 현상은 의지 바깥의 문제이다. 한 번도 발현해 본 적 없는 의지가 자기 자신까지 포함해서 어딘가로 이끌어버리는 상황인 것이다. 그는 월남전에 참전하고 적군의 창자를 꺼낼 만큼 사람을 죽였을 테지만 그가 분명히 밝히듯이 죄책감을 느끼면서 꿈속에서 뎅강 잘린 목을 들고 다니는 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자신의 현재와 같다. 시체를 끌어안고 사는 삶. 그의 반듯한 표정만큼, 조각상 같은 그의 얼굴이 보여주는 완벽한 질서만큼 그의 감정은 어디론가 사라져있고 그는 공허하다.

그러다 부하 경우진 대위(온주완 역)의 아내 종가흔(엄지연 역)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총에 맞아도 떨어진 귀걸이를 찾을 정도의 여자다. 방금 몸에 총알이 박혔는데 그녀의 관심사는 떨어진 귀걸이다. 이 정도로 스스로에게 반쯤 떠나있는 그녀이지만 이 행동 자체는 전형적인 남녀관계에서 사랑의 시작과도 같다. 여자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남자가 그것을 찾아준다. 김진평과 종가흔 간에 거의 감정적 교류가 없는 상황에서 바로 이 사랑게임이 시작된다. 감정이 먼저 조성되고 그 다음 상황이 전개되는 게 아니라 툭 하고 단절되듯 그 다음 단계의 일이 일어난다. 그 단계가 지나고 사랑의 분위기가 최고조로 가야 그나마 두 사람은 보통사람들처럼 좀 웃는다.

사랑의 역학이 인지 가능한 범위 밖에서 시작된다. 관객들 입장에서야 당연히 감정몰입이 안 되는 상황이다. '방자전'의 방자와 춘향이처럼 살아 숨 쉬는 듯한 느낌이 충만하다면, 굳이 감정을 대입하지 않으려 해도 알아서 된다. 하지만 '인간중독'의 연인들은 조금 다르다. 이미 정신이 나가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게 기본 옵션이다.

체제가 좁으면 반체제 인사가 나타나듯이 자아가 좁게 느껴지면 실제의 자신은 바깥으로 길을 잃고 만다. 그때그때 자기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스스로 마련해 주면서 분열이 기본옵션인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최선이겠지만 순수하고 정직하게 망가지는 타입도 언제나 존재한다. 그리고 그 우직한 성품이 당연히 나쁜 것이 아니다. 정신병에 걸릴 만큼 약지 않게 그대로 자기를 밀고 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김진평의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왕, 아니 대통령이 무어라 해도 자기가 따르고 있는 질서를 지킨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모순이다. 그가 정신병에 걸릴 만큼 우직하게 자신을 지켜나갔다는 것은 정신병에 걸릴 만큼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욕구에 무심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누구 하나 믿을 사람 없이 정서적으로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는 김진평은 '그러기 전'에 뭔가 조치를 취했어야 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거기에 악의는 없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살뜰히 챙기고, 틀린 일에는 맞설 줄도 안다. 하지만 자신의 근본적인 욕구, '이 세상 떠버리고 싶다'는 감각에는 황당할 정도로 무심하다. 영리하게 자신을 새장 속에 유폐시키며 다들 남으로 만들어버리는 종가흔의 자기 방어도 없다. 병을 달고 다녀도 딱히 이상할 게 없는 타입인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런 걸까? 그가 근원적으로는 급진론자이기 때문이다. 종가흔이라는 영토는 오묘한 영토이다. '음란서생'과 '방자전'에서 문제되는 사실은 갖고 싶은 영토가 왕의 영토라는 데 있다. 즉 자신이 왕이 되면 문제도 해결된다. '음란서생'과 '방자전'이 그래도 대중적인 정서를 밑바탕에 깔 수 있는 것은 이런 욕구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물리쳐야 할 적은 사람이고 대결구도도 명확하다. 하지만 '인간중독'에서 종가흔은 그렇지 않다. 김진평이 대통령이 된다 한들, 투스타 쓰리스타가 된다 한들, 종가흔을 가질 수 있을까? 사람과 사람의 대결 문제가 아니다. '음란서생','방자전'과 달리 '인간중독'의 제목이 '음란군인' 혹은 '대령전'이 아닌 까닭은 이 때문이다. 경대위와 싸우는 게 아니다. 실제로 김진평이 술에 취해 두 사람과의 관계를 주변인들에게 폭로할 때 김진평은 경대위에게 주먹을 날리면 "이, 더러운 새끼"라고 한다. 이건 한 단계 더 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김진평이 싸우고 있는 것은 세상의 더러움, 그 자체다. 그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부조리한 세상의 무질서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좀 더 제대로 돌아갔더라면! 이 여자와 내가 맺어져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닐까. 이 세상은, 정말 이 세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아닐까.

염세와 지켜내고픈 가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극렬하게 충돌한다. 해결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해결방법은 극단적이다. 종가흔에게 서울에 보직이 발령된 이후에도 계속 관계를 이어나가자고 하는 김진평의 말투에는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종가흔의 말에 "만나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그에게는 이미 하위질서의 거울이 없다. 그는, '음란서생'과 '방자전'의 모진 순간을 견디고서 마음의 어딘가가 말라버린 김대우 감독의 세계에서 아주 급진적인 해결책이 나타나 버린 것이다. 그따위 하위질서, 그냥 치워버리는 것이다. 없는 셈 치는 것이다. 아니, 이미 머릿속에서 그 필터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옳은 일을 하는데, 좀 더 맞는 일을 하는데 그게 뭐란 말인가. 사랑하면 되지 않나. 왜 압박, 자체를 느껴야 하는가. 선을 넘은 것이다.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이야 환호할 사태일지 모르겠지만, 사회적으로는 이제 그는 망했다. 그는 월남에서 1년 정도 있다가 다시 군대로 복귀하는 것, 즉 기존의 질서로 재편입되는 것을 택하지 않는다. 결국 불명예제대를 하게 된 그는 라오스에서 국경을 넘는 군인들을 도와주는 일을 한다.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채, '선'을 넘는 일을 돕는다. 이 상황에 가서야, 아마 그는 미치지 않았으리라. 그는 이제 사회적으로 어떤 식으로도 규정짓기 어려운 지점에 놓인다. 튕겨나가져버린다.

그래서 '인간중독'의 연인들이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셀카를 찍으며 신나게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타인의 거울이 아니라 스스로의 거울에 갇힌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 거울에 갇히고 나서야 온전히 행복해한다. 분열되지 않지만 유폐된다.

이렇게 또 한 단계가 끝났지만 그 대가가 너무 크다. 세 영화 중 유일하게 주인공이 죽게 되는 결말에서처럼 하위질서의 거울이 준비하고 있는 비극의 크기는 거대하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직선적인 사랑의, 혹은 섬망의 에너지는 계속하여 선을 넘는다. 달에는 아무것도 없다. 임사장(유해진 역)은 왜 달에 가려는 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하지만 같이 달 착륙 장면을 보는 김진평은 그 욕망을 혹은 추동을 이해하는 눈빛이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간다는 사실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리고 이것은 김대우 감독의 어떤 선언일 지도 모른다. '인간중독'에서 묘하게 그의 영화와 대중과의 접점이 흐릿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건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가슴 먹먹한 사랑 영화로 그치기에는 극 중에서 가장 살아있는 사람처럼 대중적인 욕망에 잘 맞닿아있는 이숙진 (조여정 역)의 손을 놓으며 "알잖아. 나 그런 데 안 가는 거"라고 말하는 김진평의 선언은 이제 하위질서의 거울을 내려놓으려는 감독의 마음처럼 보인다. 그 또한 어떤 선을 넘은 건지도.



5. 결론: 불가능한 여정



김대우 감독의 다음 작품이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마녀'라는 점은 위에서부터 쭉 써내려온 일련의 과정으로 보면 꽤 설득력 있어 보인다. 환타지로의 장르적 변화는 일종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자아는 회복되어있지만 현실의 거울에 있을 곳이 없다. 하지만 어디에든 있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거울마저 넘어버리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의식은 성장하게 되고 결국은 한계에 올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선을 넘을 수는 없다. 선을 넘는 것에도 한계는 있으니까. 어쩌면 선을 넘는 게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 다음 차원의 질문은 아주 근본적인 또 다른 지점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세상을 극복하지 않고도 분열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가? 김대우 감독의 일련의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이마에 낙인이 찍히고 사랑하는 여자가 아이 같이 변해버리고 세상에 쫓겨나 결국 죽게 되는 과정들을 거치며 우리에게 비극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기능, 즉 세상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 까지는 해냈다. 그 다음은 무언가. 망하지도, 죽지 않고서도, 우리는 이 세상의 거울을 넓힐 수 있을까. 그게 궁금하다. 그리고 역시나 일련의 흐름상 김대우 감독 또한 이 물음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자신의 방법론 자체를 되짚는 순간 말이다. 그는 또 어떻게 그 상황을 돌파할까. 궁금하다, 그 다음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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