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신춘문예-희곡] 잃어버린 계절 / 손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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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등장인물

남편, 아내, 시어머니


늦가을 오후.

낡은 주택 2층의 거실 중앙이 무대.

객석에서 마주보이는 창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지의 윗부분이 보인다. 간간이 바람이 불어 은행나무 잎이 하나 둘 땅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거실에는 3인용 소파, 낮은 좌식 테이블과 방석이 놓여있다. 무대 우측에는 좁은 부엌의 일부가 보이고 창 옆에는 화장실로 가는 문이 있다.

낡은 것과 새 것이 섞이고 육중한 것과 가벼운 것이 섞여있는 부조화한 인테리어. 신문, 뜨개질거리, 바느질 뭉치가 여기 저기 나뒹구는 어수선한 분위기다.

거실 바닥에서 다소 육중한 체구의 여자가 누워 두 손과 두 발을 붙인 채 쭉 뻗었다가 접는 운동(합장합족 운동)을 과장되게 열중해서 하고 있다. 시멘트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 여자의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손에는 신문과 우편물을 들고 있다.



남편 나 왔어.

아내 (운동을 계속하며) 응.

남편 뭐하는 거야?

아내 자궁의 기운을 강화하고 후 후 역아를 방지하는 운

동이야 후 후. 100번씩 후 해야 해.

남편 이상한데.

아내 붕어운동이라고. 후 후 이래 뵈도 효과가 크데 후.

밥은?

남편 (소파에 앉으며) 간단하게. 당신은?

아내 나도. 별 일 후 없었고?

남편 (우편물 들여다보며) 응. 그렇지 뭐.

아내 후~ 오늘은 이 정도만.

남편 100번 다 했어?

아내 이미 몇 번 했는지 까먹었어. 숨이 가쁘니까. 그 정

도 한 걸로 치고.

여자, 스트레칭을 하더니 다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두 팔과 다리를 위로 치켜들고 힘껏 흔든다.

남편 뭐야. 아직도 남았어?

아내 이건 혈액순환을 도와주는 운동. 자기도 시간 날 때

해봐. 몸에 좋데. 부종을 예방해 주는 거야.

남편 보기엔 좀 거시기하네.

아내 동물들도 아플 땐 이렇게 해. 개도 아프면 외진 데

가서 이러고 있다던데.

남편 설마. (우편물을 보다가) 어? 이거 뭐야?

아내 왜? 뭐?

남편 카드값이 왜 이렇게 많이 나왔어?

여자 벌떡 일어나 남자의 손에서 우편물을 낚아챈다.

남편 어디 봐. 어디 다 쓴 거야?

아내 별 거 아냐.

남편 별 거 아니긴. 22만원이나 나왔잖아. 22만원이 애

이름이야?

아내 (감추며) 세탁기 이름. 필요해서.

남편 설마 멀쩡한 세탁기를 놔두고 또 산 건 아니지?

아내 자기야. 그러지 말고 여기 좀 앉아봐. 내가 다 설명

할게. 엊그제 통신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우리 지금

쓰는 통신사 약정기간이 끝났데. 통신사를 바꾸면

현금 22만원을 준다지 뭐야?

남편 그래서 22만원을 지르셨다?

아내 그 전화를 받고 있는데 글쎄 홈쇼핑에서 애기 옷 세

탁기를 엄청 할인하는 거야. 자기도 그때 백화점에

서 봤잖아. 그게 시중가는 엄청 비싸거든. 금액도

딱 22만원. 우연치고는 너무 신기하지 않아? 이건

내가 결정한 게 아니라 어떤 큰 힘이 나를….

남편 (말 자르며) 그래도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니잖아.

아내 아냐. 이게 애기 옷만 세탁하냐, 그랬으면 사지도

않았어. 이걸로 우리 속옷도 세탁할 수 있어. 삶은

것처럼 깨끗해진다더라고. 댓글 봤는데 와, 자기도

봐야해. 반응이 장난 아니야. 왜 이런 문명의 이기

를 누리지 않고 원시인처럼 살고 있나 싶었다니까.

남편 그냥 세탁기에 넣으면 되잖아.

아내 자기가 몰라서 그래. 속옷은 일일이 손빨래를 해야 한

다고. 자주 삶아야 되고. 그게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

지 알아?

남편 이제 홈쇼핑 채널은 그만 좀 봐. 쓰지도 않는 전기

오븐기에, 녹즙기 또 뭐야. 얼마 전에 산 운동기구

까지,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나? 우리 사정

도 예전 같진 않잖아.

아내 그게 당신이 계속 없었으니 의논할 수가 있어야지.

살림하다 보면 필요한 것도 많고… 참. 오늘 밑에 주

인집 새로 이사 와서 시루떡 주고 간 게 있는데 먹을

래?

남편 이사? 오늘이었나.

아내 (탁자 위에 신문으로 덮어둔 시루떡을 꺼내 손으로

찢으며 고물을 쪽쪽 빤다)

남편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내 왜? 안 먹어? 자~ 아 해.

남편 젓가락 갖다 줘.

아내 이건 이렇게 먹어야 제 맛이지. 아, 해. 맛있다. 그치?

남편 응. 오랜만이네. 시루떡.

아내 그렇지? 이사떡 돌리는 거 어렸을 때 보고 처음이

야. 우리처럼 젊은 부부던데. 둘이서 이 큰 집을 어떻

게 샀을까. 분명 부모 잘 만난 덕이겠지?

남편 별 다른 말은 없고?

아내 그냥.

남편 그냥 뭐?

아내 전주인이 시세에 비해 월세를 낮게 받았다네.

남편 낡아빠진 2층 주택인데 월세를 또 올리겠다고?

아내 아니. 아니. 그냥 지나가는 말로. 월세 올린다는 얘

긴 안했어. 인상이 참 좋아 보이던데.

남편 그게 그거지 뭐야.

아내 왜 더 안 먹어? 몇 개 더 먹어보지?

남편 됐어. 별 맛도 없는 떡을 갖다 줬네. 물 좀 갖다 줘.

아내 응 잠깐만.

여자, 재빨리 일어나 부엌에서 물 한 컵을 받아들고 나온다.

사이. 남자,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향해 걸어간다.

아내 또 나가려구?

남편 (핸드폰을 꺼내 흔든다) 전화가 와서. 통화 좀 하고.

아내 자. 물이라도 마시고 가.

남편 네. 접니다.

남자가 나간 후 혼자 남겨진 여자. 물컵을 탁자 위에 놓아두고 말없이 떡을 먹는다. 떡을 먹다가 얹히는지 기침을 하며 물을 마시는 여자. 물을 마시다 말고 창밖의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배를 어루만진다.

암전.



어두운 무대.

천장에 실을 단 커다란 잉어 모양의 등만이 불을 밝히고 있다. 소파에 누운 여자가 잉어를 잡으려 두 팔을 휘젓지만 헛수고일 뿐이다. 잉어는 점점 위로 올라가고 여자가 일어나 손을 뻗어본다. 사라져가는 잉어를 멍하니 바라보는 여자.

암전.



사이.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불이 환하게 켜진 거실 소파에 손에 리모컨을 움켜쥔 채 여자가 모로 누워 자고 있다. 지지직거리는 TV 소리가 들린다. 조심스레 다가간 남자가 여자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려 하지만 여자는 리모컨을 놓지 않는다. 짧은 실갱이 끝에 리모컨을 빼앗은 남자가 TV 전원을 끄고 동시에 잠이 깬 여자.

아내 끄지 마. 보고 있어.

남편 입에 침이나 닦아.

아내 몇 시야, 지금?

남편 1시 조금 넘었어. 방에 들어가서 자. 얼른.

아내 술 마셨어?

남편 소주 한 잔.

아내 누구랑?

남편 김씨 아저씨.

아내 그치랑 마셨는데 잘이나 소주 한 잔이겠다.

남편 먼저 자라고 문자 보냈잖아. 방에서 자지 왜 만날 소

파에서 자냐?

아내 (하품) 자기는 뭘 자. TV 보고 있었어.

남편 아~ 정규방송 끝나고 지지거리는 화면 보셨어요?

TV 켜놓고 잤으면서 끄려면 꼭 본다고 끄지 말래.

너 이럴 땐 우리 엄마랑 아주 똑같아.

아내 그래도 내 말동무 해주는 건 TV밖에 없다. 뭐. 자기

보다 낫다고. 그나저나 기분 좋은 꿈 꾸고 있었는데.

남편 들어가 자.

아내 무슨 꿈인지 묻지도 않네.

남편 들으나 마나 개꿈이야.

아내 들어봐. 내가 커다란 잉어를 잡은 꿈이야. 동네 사

람들이 다 나와서 축하한다고 얘기해 줬어. 잉어가

엄청나게 크고 어찌나 팔딱거리는지 놓치지 않으려

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근데 그 중요한 순간에 잠

이 확 깨버렸다니까.

남편 리모컨이었어.

아내 응?

남편 당신이 잡으려던 거 리모컨이었다고.

아내 꿈에선 잉어였어. 내 다리통보다 큰 잉어. 잉어꿈은

아들태몽인데. 우리 나무 태몽을 지금 꾼 건가?

남편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자!

아내 갑자기 왜 큰 소리야? 잠 다 깨게.

남편 늦었으니까 자라고 그만.

방으로 들어가려는 남자를 붙잡는 여자.

아내 자기, 왜 그래? 며칠 만에 집에 와서는 들어오자마

자 또 나가버리고. 나는 자기 기다리다가 잠든 건

데... 새벽에 들어와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남편 졸려서 그래. 내일 얘기하고 들어가서 자자.

아내 꼭 자기가 불리하면 다음에 얘기하자 그러지.

남편 (눈을 감기며) 자, 잠이 온다, 온다, 그렇지 잠이 온다

….

아내 (손을 치우며) 됐어. 안 와. 잠이 안 와.

남편 좋아. 그럼 나 먼저 잔다.

아내 가지마. 나 아직 잘 기분 아냐.

남편 날 더러 어쩌라고.

아내 옆에 있어. 그냥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되니까 옆에만

있어. 잠이 올 때까지.

남자, 여자 옆에 앉아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는다. 여자는 남자의 눈 감은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혼잣말을 한다.

아내 자기야, 우리 나무 태어나면 이름을 뭘로 할까? 그

것보다 도대체 어떤 얼굴일까? 진짜 신기하겠지? 가

끔 이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 전

에 TV에서 어떤 사람이 강의하는 걸 들었는데 아이

는 엄마 무의식의 산물이래. 늘 내 안에 있으면서 내

모든 생각, 행동을 함께 하니까. 정말 그런 것도 같아.

자기야. 나는 크리스마스 때도 교회 한 번 가본 적

없었는데, 세상에 신이 어딨어? 그랬거든. 근데 요

즘엔 우리 나무가 나의 신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

봤다. 내 모든 걸 보고 있으니까, 그래서 조심하게

되고 잘 해야겠다 다짐하고…. 듣고 있어? (남자를

흔든다) 이 안에 신이 있다고.

남편 (잠깐 눈을 떴다 다시 눈을 감으며) 어.

아내 그러니까 우리 나무가 우리의 신이 아닐까 생각했다

고. 자기야, 자? 나 있잖아. (속삭이며) 요즘에 딴

남자랑 자는 꿈을 꿔. 깨고 나면 얼굴도 기억나지 않

는데,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그 남자

와 자면서 진짜 좋았다. 아니. 오해는 하지마. 자기

보다 좋았다는 게 아니라 진짜인 것처럼 좋았다고.

꿈이니까 뭐라고 안 할거지? 벌써 서너 번 그랬나.

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근데 우리 나무가 내 꿈까지

보는 건 아니겠지? 그럼 곤란한데. 나무는 이 안에

서 뭘 할까? 열 달 동안 기억하지도 못할 꿈을 꾸고

있는 걸까? ... 자기야, 자?

남편 ….

아내 방에 가서 자야지. 자, 들어가자.

남편 어? 어.

남자를 부축하는 여자와 남자가 나란히 방으로 들어간다. 남자를 방에 눕히고 여자가 다시 거실로 나와 거실을 한 번 쓱 돌아본 후 불을 끈다.

암전.



아침. 햇살이 방안을 채운다. 여자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뇌호흡 명상 CD가 플레이 중이다.

CD 환한 빛이 머리끝 백회로부터 들어와 가슴과 태아

가 있는 뱃속, 팔과 다리, 온몸을 감싼다고 상상합

니다. 그리고 어두웠던 그간의 마음들을 모두 날려

버린다고 상상하십시오. "이제부터 나의 영혼을 성

장시킬 새로운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며 아기와

나는 잘 해낼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사랑의 빛이

몸 구석구석을 환하게 쓰다듬습니다.

아내 우리 아기와 나는 잘 해낼 것입니다.

남자가 기지개를 켜며 방에서 나온다. 여자를 슬쩍 보더니 화장실로 향한다.

CD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눈을 뜹니다.

아내 서서 누지 마!

변기물 내리는 소리. 남자가 화장실에서 나와 부엌으로 간다. 여자가 명상을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 화장실 문을 열어본다.

아내 이거 봐. 이거 봐.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서서

누지 말랬지? 앉아서 누라고. 앉아서!

남편 (부엌으로 가면서) 알았어. 알았어.

아내 만날 알았다고 말만 하고! 서서 누면 2천800방울의

오줌이 튄다고. 사방으로. 그럼 냄새나지, 냄새만

나면 괜찮게? 그 주변이 완전 오염된다고. 지금이

야 우리 둘이니까 괜찮다고 쳐. 나무가 태어나면?

나무 태어나면 그땐 더러워서 같이 못살아.

남편 (물을 따라 마시며) 세 봤어?

아내 뭐?

남편 세 봤냐고? 2천800방울.

아내 몰라. 전에 신문에서 봤어. 사람에 따라 그보다 많

을지도 모르지. 어제 술 마시고 들어왔으니까 오늘

자기는 한 3천500방울 튀었을지 몰라.

남편 그런 거 다 뻥튀기 된 거야. 믿지 마.

아내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말이야.

남편 근거 좋아하시네. 우리 파업할 때 신문에서 뭐라고

한 줄 알아? 하루 파업하면 530억이 날아간다네.

웃기지도 않지. 대충 이렇게 저렇게 때려 넣어서 지

들 멋대로 만들어낸 돈이라고. 2천800방울? 530

억? 지들 멋대로지. 그냥.

아내 그걸 왜 거기다 갖다 붙여? 괜히 앉아서 누기 싫으

니까. 그치, 나무야?

남편 (걱정스런 눈빛) 좀 더 자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

어?

아내 갑자기 목소리는 왜 깔아? 일찍은 무슨 일찍. 자기

가 늦게 일어났으면서. 밥이나 먹자.

남편 (부엌으로 가려는 여자를 안으며) 앉아서 눌게. 한

방울도 안 튀길게. 됐지?

아내 나무야, 니네 아빠 갑자기 왜 이런다니.

남편 우리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밖에 나가서 먹자. 어때?

아내 외식은 무슨. 귀찮아. 집에서 먹어.

남편 나가자. 나가서 바람도 쐬고 자기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아내 됐어. 그냥 집에서 먹어. 밥 금방 해.

남편 그럼 간단하게 먹자. 뭐 먹고 싶어? 말만해. 내가

다 해줄게.

아내 자기 할 줄 아는 게 라면밖에 더 있어?

남편 아, 걱정 말고 주문만 해.

아내 뭐, 그래도 자기가 끓여주는 라면이 맛있긴 하지.

근데 한 봉지밖에 안 남았는데 모자라겠지?

남편 내가 금방 가서 몇 개 더 사올게. 암 것도 하지 마. 내

가 다 할 테니까.

아내 으이그. 생색은.

남자, 웃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간다.

아내 나무야, (창으로 다가가며) 은행잎이 많이 떨어졌

네. 우리 나무, 은행나무 보이니? 우리 나무가 엄

마한테 왔을 땐 은행잎이 새파랬는데 어느새 노랗

게 변했어요. 시간 참 빠르다.


문 두드리는 소리. 곧이어 문이 열리며 양 손에 보자기로 싼 플라스틱 반찬통을 들고 여자의 시어머니가 들어온다.

아내    벌써.. (시어머니를 알아보고 달려간다) 어머니! 연

            락도 없이 웬일이세요?

시어머니   큰애는 큰애대로 안받고 너는 폰이 꺼져 있대

                  고. 원 통 연락이 돼야 말이지. 이거나 받아라.

                  에그. 정리 좀 하고 살지.

아내    (허겁지겁 감추기 시작한다) 

시어머니 에그머니나. 애 떨어지겠구나. 하긴 니가 노조대

               표부람서 이직이나 할 수 있겠냐. 그래, 그놈의

               회사엔 다시 안나가봐도 되는 거야?

남편      가보긴 해야겠는데 저 사람 저렇게 두고 계속 나가

              있을 수도 없고. 일단 양해는 구해놨어요.

시어머니 나라도 챙겨주면 좋겠다만…. 내가 여기 와 있으

                 면 지수 애는 또 누가 보냐.

남편    됐어요. 저희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창가로 다가가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남자의 어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가고. 남자 창밖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사이.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온다.

시어머니 미역국은 냄비에 뒀으니까 데워먹기만 하면 되

               고, 밥은 앉혀 놨다. 에미 잘 챙겨 먹여라. 사산도

               애 낳은 거랑 진배없어. 지금 잘 조리하지 않으면

               몸에 바람 든다. 알았어?

남편     네.

시어머니 그래, 난 이만 가보마.

남편    식사라도 같이 하시고 가시죠.

시어머니 이 꼴을 보고 밥이 넘어가겠냐? 에미한테는 바

               쁜 일이 있어 갔다고 전해라. 추운데 나오지 말고.

뒤돌아 나가는 어머니.

남편    엄마!

시어머니 (돌아보며) 응. 왜?

남편    그냥.

시어머니 쓸데없긴. 간다.

고개 숙이는 남자. 서서히 암전.

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일요일 오후. 창으로 석양이 비추며 거실이 온통 붉다. 거실에서 여자가 밥솥 째 밥을 먹고 있다. 김치를 손으로 찢어 게걸스럽게도 먹는다. 방에서 남자가 나온다.

남편     뭐해? 점심 먹고 또 먹는 거야? 제대로 좀 차려먹

             지. 이게 뭐야. 밥솥에 아주 그냥 얼굴을 묻겠다...

             뭐야? 그 많은 밥을 다 먹은 거야?

아내    그게… 계속 배가 고파서. 당신도 같이 먹을래?

남편    됐어. 점심 먹고 잤더니 난 영 속이 안좋아.

계속 밥을 먹는 여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자.

아내    (멈추고) 자기야. 나 추하지? 살도 많이 찌고. 보기

            싫지?

남편    아니야. 당신 보약이라도 한 제 먹어야겠어.

아내   흐흐. 밥이 보약이라잖아. 괜찮아. 보약은 자기가 먹

           어야 하는데. 얼굴이 이게 뭐야. 밖에 있어도 밥 잘

          챙겨먹고. 알았지?

남편   살 안쪘어. 그대로야.

아내   거짓말. 나 예전에 입던 옷이 하나도 안맞아.

남편   (위 아래 보며) 잘 맞기만 하네.

아내    이거 당신 옷이야.

남편    ….

아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벌써 가을이네. 가을이

            참 슬프다. 단풍 든 저 나무. 늙어빠진 창녀의 마지

            막 화장 같지 않아? 잎이 다 떨어져서 초라해지기

            전에 하는 마지막 발악.

남편    너도 참.

아내    집주인이 내일 저 나무 벨 거래. 주택 정원에는 안어

           울린다나.

남편    응.

아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남편    집주인 마음이지 뭘. 요샌 가로수길에도 단풍나무

            잘 안 심는데.

아내   당신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우리가 저 나무

            랑 함께 한 시간이 얼만데! 나무가 들으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남편    그 얘기가 아니잖아.

아내    (울음)

남편    울긴 왜 울어? 나중에 주택사서 나무 많이 심어

          줄게. 정원에 빽빽하게 발 디딜 틈도 없이 원 없

          이 심어줄게. 

아내    나무 없이 어떻게…. 이제 나 어떻게 살아? 응?

남편    내가 있잖아.

아내   나 아직 나무가 움직이는 걸 느껴. 꼬물꼬물. 뱃속에

           서 물고기가 꼬리를 흔드는 느낌.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이는 느낌.

남편   이제 놔주자.

아내   아니야. 아직 있을 지도 몰라. 의사가 잘못 본 걸 수

          도 있어. 그렇잖아. 나 살도 계속 찌고. 밥맛도 너무

          좋아. 나무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한 번만 한 번

           만 더 확인해 보자. 다시 한 번 봐달라고 해보자.

서둘러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는 여자, 여자를 잡는 남자.

아내     이거 놔. 병원에 다시 가 볼거야.

남편     봤어. 내가 다 봤다고!

아내     아니야!

남편     내가 화장터 들어갈 때 봤어. 그리고 이 손으로 잘

             가라고 배웅도 해줬어. 그만하자. 응?

아내    아니야! 아니라구.

남편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데? 억지 쓴다고 될 일도

             아니잖아?

아내   그럼 당신은? 당신은 어딨었어? 우리 애가 그 지경

           이 될 동안 당신은 어디서 뭘 했어?

남편    그래! 다 나 때문이야. 이렇게 빌게. 내 잘못이야.

            다 내가 못나서 이렇게 된거야. 됐어? 이제 속이 시원

              해?

아내    당신 그날 이후 날 한 번도 안아준 적 없었던 거 알

             아? 난 날마다 딴사람 품에 안겨 사랑을 나누는데.

            당신은 한 번도… 나는 나무만 잃은 게 아니라 당신     

            도 잃어버린 것 같아서.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남편   그런 말이 어딨어? 나 여기 있잖아. (여자를 안는다)

아내   우리 엉망이다. 그렇지? 파산 직전에 사산까지. 사

            는 게 왜 이렇지?

남편    이런 게 사는 거지. 버라이어티하게~

아내    (피식) 말이나 못하면….

남편    웃었지? 방금 웃었지? 얼레리 꼴레리 울다가 웃으

            면~~ 똥꼬에 털이 난데요.

아내    됐거든. 그나저나 세탁기는 어떡하지?

남편    그냥 쓰지 뭐. 속옷 세탁할 수 있다며.

아내    응. 써본 사람들이 엄청 편하대.

남편    그럼 됐어.

아내    자기야.

남편    또 왜?

아내    울었더니…배고프다.

남편    그래. 우리 뭐 좀 먹자.

아내    있지. 나무 가지고 내 인생 처음으로 뭔가 꽉 차 있

           다는 느낌을 받았거든. 근데 그 일이 있고나서는 늘

           배가 고파.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져서 하루 종일 먹

            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

남편    몸이 허해서 그래. 잘 먹어둬야지. 엄마가 이것저것

            놓고 가신 것 같던데 밥 차릴까? 뭐 먹고 싶어?

아내    라면. 당신이 끓여주는 라면이면 돼.

남편    그래. 좋아. 최고의 라면 맛을 보여 주지. 자~ 여기

            서 편안하게 쉬고 있어.

남자는 부엌에서 분주하고 여자는 소파에 모로 기대어 눕는다.

아내    자기야.

남편    응?

아내    전에 TV에서 누가 그러던데 지구의 바다는 엄마의

            양수와 같대.

남편    아이가 무의식의 산물이라 했던 그 사람?

아내    응. 그러고 보면 성장영화에서 소년들은 죄다 바다

            로 간다.

남편    그래?

아내    400번의 구타, 달콤한 열여섯... 바다 보고 싶단 사

            람은 왜 그렇게 또 많아? 아프기만 하면 바다 보고

           싶대지.

남편    그러네.

아내    자기야.

남편    응?

아내    우리 나무도 바다에 뿌려줬댔지?

남편    응. 아버지 산소 앞에 있는 바다. 가볼래?

아내    그래도 될까. 이렇게 되려고 나무는 태몽도 안보여

            줬나봐. (쿠션에 얼굴 묻는다)

서서히 암전

 

다음날 아침. 창문 너머로 보이던 은행나무가 사라지고 없다. 방에서 외출복을 입고 나오는 두 사람. 캐리어를 끌고 나온다.

아내    다 챙겼나 모르겠다.

남편    하룻밤 자고 오는 건데 뭐 챙길 게 있다고.

아내    그래도. 여행이잖아. 오랜만이다. 그렇지?

남편    신혼여행 갔다 오고 처음인가?

아내    이제 아셨어? 그때도 회사 근무 맞춘다고 2박3일로

            제주도 다녀온 게 다였는데.. 5년 만에 외출이네.

남편    가자! 꾸물거리다가는 차 밀린다고.

아내    말이나 못하면!

남자 밖으로 나가고 여자 뒤따라 나가려다 다시 거실로 들어오며.

아내    (밖으로) 자기야, 잠깐만 먼저 가고 있어.

남편    (목소리) 왜?

아내    응. 뭘 좀 놓고 와서.

거실로 들어온 여자, 두리번거리다 창문 밖을 한동안 쳐다본다.

아내    (배를 쓰다듬으며) 나무야. 상처 많은 나무일수록

           더 예쁜 결을 만든다지? 너한테 부끄럽지 않게 견딜

           게. 참아 볼게.

남편(소리)    뭐해?

아내    응. 나가!

밖으로 나가는 여자.

암전.

the end.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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