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표준시가 만들어진 것이 철도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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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박흥수

철도는 인상파 화가들의 예술혼을 일깨우기도 했다.

기차여행. 이 짧은 단어를 떠올리면 왠지 편안한 설렘이 인다. 숨 고를 틈 없는 고단한 삶을 살아 내고 있는 나를 위한 선물. 기차 안엔 늘 탄 사람들의 가벼운 흥분이 떠다닌다.

대학시절 '춘천 가는 기차' 속의 들떴던 마음과 창문 가득 스위스의 아름다운 산과 호수가 펼쳐졌던 스위스 파노라마 열차의 평온함, 예전 비둘기호만큼이나 역이란 역에 빠짐없이 다 서던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속 징글징글했던 무료함까지도. 지나고 보니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다.

'덕후' 기관사가 들려주는 근대 여행기
인상파 화가들 철도서 영감 얻어 작품
적 침입 막기 위해 선로 간격 달리해
민영화가 부른 열차 탈선사고 성찰도


영화 '비포 선 라이즈'(1995년)부터 '비포 미드나잇'(2013년)까지 18년이란 세월을 같이 늙어간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처음 만난 곳도 기차 안이었다. 흔들리는 기차는 때로 사람의 마음도 함께 흔든다.

남들에겐 일상탈출의 기쁨이지만 기차여행이 숨막히는 일상인 기관사라면. 그에게도 기차여행은 매력적일까. 기-승-전-철도. 철도를 너무 사랑해 이제 지나가는 이들을 잡고 "철'도'를 아십니까"라고 묻고 싶은 경지에 이른 기관사가 있다. 정부의 철도 민영화를 막기 위해 철도에 대해 치열하게 공부했던 기관사는 '북 푸어(Book poor)'를 불사하며 철도 관련 책에 매달리다 철도의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됐다.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는 이 철도 '덕후' 기관사가 권하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근대 여행기다. 근대 발명품인 철도의 역사는 바로 근대의 역사다. '인류의 노스탤지어' 철도는 세상을 어떻게 바꿨나.

마차를 대체한 철도(선로와 기차를 함께 일컫는 말). 기차는 마차의 바퀴 폭과 같은 폭을 가졌지만 빠르고 강력한 힘으로 새 시대의 주인이 됐다. 철도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권이 등장했고 도시는 확장됐다. 철도의 시대를 연 영국에선 싱싱한 생선이 유통되면서 피시 앤 칩스가 탄생했고, 여행자를 위한 호텔이 번성했다. 인상파 화가들은 철도에서 깊은 영감을 얻어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반 고흐) '생 라자르역'(클로드 모네) 같은 작품을 남겼다. 

반 고흐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 후마니타스 제공
클로드 모네 '생 라자르역'.
1884년 그리니치 천문대를 본초 자오선으로 하는 세계 표준시가 만들어진 것도 철도 덕분이었다. 기차로 이동하는 중 나라마다 다른 시간이 자칫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철도는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개척한 주요 무기였고,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 비장의 카드이기도 했다. 철도는 평범한 이들을 미지의 땅으로 데려다 주었지만, 수많은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실어 나르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에 거대한 유대인 수용소가 세워진 이유는 단순했다. 유럽 각 지역에서 오는 철도들이 만나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철도 노동자들은 유대인들을 '대학살 장소'로 실어 나를 수 없다며 파업을 했고 나치 점령하 프랑스 철도의 운행을 방해했던 철도 노동자들도 레지스탕스였다. 철도 시설과 운영은 한 몸이라는 철학을 팽개치고 철도 민영화를 밀어붙인 영국은 열차 충돌과 탈선으로 56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를 겪는다.
오노레 도미에 '삼등열차'.
선로의 간격, 궤간에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문제들이 함축돼 있다. 철도를 통한 침략을 막으려면 궤간을 달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침략을 겪은 스페인이 프랑스 철도 궤간보다 넓은 궤간을 선택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1901년 공사가 시작된 우리나라 경부선은 대륙 진출을 염두에 둔 일제가 중국과 유럽 대부분 국가들과 같은 표준궤(1,435㎜) 도입을 밀어붙여 표준궤가 됐다.

'철도의 역사는 차가운 철이 가장 뜨겁게 인간을 만난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철도 역사를 따라 근대를 더듬는 여행은 기차를 타고 달리는 것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내용을 임팩트 있게 줄였더라면 더 좋았을 거란 아쉬움은 있다. 박흥수 지음/후마니타스/480쪽/2만 원. 강승아 기자 se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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