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훈의 부산 돋보기] 행복한 바닷길, 볼레길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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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남동 바닷길을 걷는 볼레길. 근대역사관 제공

부산의 갈맷길 걷기가 크게 유행이다. 길은 건강을 위해서만 걷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길 위에서 많은 것을 얻는다. 아름다운 풍경을 관찰하고, 지나간 과거를 뒤돌아보고, 자아를 성찰하기까지 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옛길인 문경새재는 조령(鳥領)을 넘는 고갯길이다. 험준한 문경새재를 걸으면 산속 깊은 경치와 옛 길손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데, 현실과 좀 떨어졌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갈맷길은 이런 아쉬움을 털어 줄 뿐 아니라 특별한 매력까지 더해 있다. 짙푸른 망망대해를 펼쳐 주면서도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도시를 힘껏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오늘을 벗어나지 않고도 자신을 관조하는 여유와 색다른 낭만에 빠질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갈맷길에서 가지를 친 서구의 볼레길은 그야말로 행복한 바닷길이다. 볼레는 '볼래'와 '둘레'를 조합시켜 만든 말이란다. '풍부한 볼거리를 둘러보는 길'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부산사람들이 볼레길을 자유롭게 걷게 된 지는 십여 년이 됐다. 오랫동안 암남공원 일대가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동물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시설인 혈청소(수역혈청제조소)가 세워졌고, 해방 후에는 해안가를 경비하는 군부대가 들어섰다. 조개 속의 빛나는 진주처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숨겨진 비경으로 회자됐다. 그러다 1997년 이후 암남공원이 완전히 개방되면서 해안 절경을 만끽할 수 있는 볼레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볼래' '둘레' 합쳐진 '볼레길'
숲길과 바닷길 함께 걷는 여정
암남공원 개방으로 비로소 열려

품 넓은 부산의 존재감 확연히
송도 해녀들 삶터도 품어내

볼레길은 숲길과 바닷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여정이다. 태고의 숲을 품은 암남공원을 한 바퀴 돌아서 지구가 마술을 부린 해안 절벽을 따라 이어지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 해수욕장인 송도해수욕장에서 끝을 맺는다. 이 일대는 암남반도와 송도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암남반도는 천마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다가 대마도를 바라보며 우뚝 멈춰 선 형세다. 반도의 바깥 언저리는 치마를 바짝 두르듯 적갈색과 녹회색의 절벽으로 장식되어 있다. 1억 년의 세월을 통과하며 형성된 암석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이 낭떠러지를 암남동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시루떡 바위." 이것이야말로 어느 지질학자도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정의이다. 길손들은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시루떡 바위를 따라 걸으면서 자신의 삶에 쌓인 인생의 층위들까지 돌아본다.

암남반도가 방파제처럼 성난 파도를 막아 주기에 송도만은 평온하고 여유롭다. 그리하여 볼레길에서는 절벽을 내리치는 성난 파도와 잔잔히 밀려오는 푸근한 파도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우리 인생도 두 얼굴의 파도처럼 늘 세파로 휘몰아치는 것도 아니요, 늘 따뜻한 봄날이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속을 깊게 깎은 오목한 해안선에서 송도해수욕장이 염화미소를 짓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한 신문은 이 해수욕장을 '항아리 속에 잠긴 듯한 호수'라고 표현했다. 송도해수욕장이 천혜의 입지조건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고개를 들어 남쪽바다를 보니 크고 작은 배들이 두둥실 떠 있다. 선박들의 바다 주차장인 묘박지(錨泊地)다. 배도 사람처럼 쉬어야 하는 법. 나날이 거친 대양을 뚫고 항해한 선박들은 눈을 붙이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

부산 바다는 지치고 힘든 배들에게 이렇게 쉼과 에너지를 준다. 볼레길이 없었다면 품이 넓은 부산의 존재감을 깨닫지 못했을 터. 다시 볼레길을 쭉 걷다 보니 부단히 자맥질을 하는 송도 해녀들과 만났다. 해녀에게 바다는 먹거리를 수확하는 일상의 삶터였다. 이렇게 볼레길은 한시도 볼거리를 놓치지 않고 구불구불 이어간다. 볼레길은 정말 행복한 바닷길이다.

류승훈 

부산근대역사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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