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열병식의 국제정치
/임석준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
중국이 3일 열리는 전승절 70주년 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을 초청했고 한국은 오랫동안 고민하다 결국에는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대통령의 열병식 참석이 국익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놓고 외교 전문가들은 의견이 분분하다. 환영하는 측에서는 이를 계기로 한·중 관계가 한층 두터워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옆자리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앉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상석에 해당하는 이 자리는 최근 강화된 한·중 관계와 냉랭해진 북·중 관계를 반영한다는 분석이다. 한편, 대통령의 열병식 참석을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중국은 6·25 전쟁 때 우리에게 총을 겨눴고, 미국의 동맹·우방국은 하나도 참석하지 않는데 굳이 우리가 참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은 국제사회의 중견국가로 발돋움했다. 따라서 주변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주외교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박 대통령은 중앙부처 실·국장 등을 상대로 한 세미나에 참석해 "외교에 있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겠네'라고 생각하면 우리나라 국격에도 맞지 않는 패배의식"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중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이익이 교차하고, 일본과 북한까지 신경 써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외교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영향력이 커지는 중국을 선택해야 하는가.
박근혜 대통령 中 열병식 참석
장기적으론 '외교적 오판' 가능성
중국의 소프트 파워는 낮은 수준
미국 대체 새 국제질서 어려워
미국 중심 국제 체제 이탈 않으며
할 말 하는 '목소리 내기' 외교 필요
정치경제학자 허쉬만은 조직이 쇠퇴할 때 구성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으로 '빠져나가기(Exit)' '목소리 내기(Voice)' '충성하기(Loyalty)' 등 세 가지를 전략이 있다고 한다. '빠져나가기' 전략은 쇠퇴하는 조직을 버리고 다른 조직에 가담하는 것이다. '목소리 내기'는 쇠퇴하는 조직이 회복될 수 있도록 구성원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거나 항의를 하는 행위이다. '충성하기'는 조직에 수동적으로 머물며 충성을 바치는 처세를 말한다. 구성원이 이 중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는 '개인의 역량'과 '조직의 복원력에 대한 신뢰'로 결정된다. 만약 구성원이 능력이 있고 조직이 회복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다면 조직을 회복시키는 '목소리 내기' 전략이 옳은 선택일 것이다. 개인이 능력은 있지만 조직이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빠져나가기' 전략을 통해 다른 조직으로 갈아타는 것이 능수일 것이다. 그리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조직의 복원력과는 상관없이 수동적으로 충성하는 전략이 우위일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한국의 상황에 대입해 보자. 전통적으로 우리 외교는 미국이 구축한 국제질서에 대한 '충성하기' 전략으로 일관했다. 과거 한국은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독자적 외교를 펼칠 수 있는 행동의 반경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렇지만 반공산주의와 자유무역을 앞세운 미국의 국제질서가 견고했기 때문에 우리는 '충성하기'를 통해 경제 발전과 국가 안보라는 과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미국은 대테러 전쟁, 금융위기, 그리고 중국의 등장으로 그 패권적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한편 우리는 국력이 많이 신장되었기 때문에 맹목적 충성하기 전략은 실효성이 약하고, 이제는 빠져나가기 혹은 목소리 내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택이 단기적인 시각보다는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장기적으로 회복될 것인지, 아니면 중국이 미국을 대체하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지를 놓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필자는 이번 전승절 기념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우리의 외교적 오판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시장 원리와 개인의 선택을 기반으로 만든 미국의 국제체제는 지금 쇠퇴하고 있어 보이지만 그 복원력이 매우 강력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경제·군사력에 기반을 둔 '하드파워'는 약진하고 있지만, 국제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 자유, 민주주의, 인권, 환경 등 보편적 가치에 기반을 둔 '소프트파워'는 형편없는 수준이다. 이번에 거행되는 중국의 전승절 행사만 보아도 '항일 전쟁과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이라는 매우 편협한 표어를 내걸고 있다. '항일'이라는 표어는 일본을 악당으로 만들고 배제시킨다는 점에서 당장 우리의 속을 후련하게 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국제사회의 중요한 행위자를 포용하는 장기적 리더십의 효과는 없을 것이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한 광해군의 사례에서 보듯이, 모호한 중립외교는 국가를 매우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중국 전승절 행사 이후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향후 우리 외교는 미국 중심의 국제체제에서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미국에 할 말을 하고 체제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 내기' 전략을 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