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한글 연구'의 통념을 뒤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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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을 한글과 한자 서체의 복합구성으로 제시한 허경무 부산한글학회 회장의 작품. 허경무 제공

'어리석은 백성들이 쉽고 배우고 쓰게 하려고 만든 새 글자.'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 한글에 대한 통념이다.'영명하신 세종대왕이 사상 유례없는 독창적 글자를 만드셨다'와 함께 한글과 세종대왕을 신화화하는 인식이다.

'한글의 발명'의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이같은 상식과 정면충돌하게 된다. 저자인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글은 발음기호로 만들어진 것이지 처음부터 새로운 문자 체계가 아니었다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그는 훈민정음 언해본의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 통하지 않는다'는 풀이에 오해가 있다고 설명한다. 원래 서문(國之語音 異乎中國)의 의미는 한자음의 차이를 지적한 것이지 언어의 차이가 아니어서다. 

한글의 발명 / 정광

저자는 한글 창제의 동기를 고려 전기까지 비슷했던 한자 발음이 원나라에 들어 북경 한어와 크게 달라지자 우리 한자음을 중국에 맞추려한 것이라고 본다. 중국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바른 한자음, 즉 훈민정음이었고, 이를 위한 발음기호가 필요했다. 훈민정'음(音)'은 어디까지나 발음일뿐 글자가 아니었다.

한글 발명의 최대 조력자도 불가의 학승이었다. 고대 인도의 발달한 조음음성학이 팔만대장경 속에 포함되어 전해졌고, 음성학을 연구한 학승들이 새 문자 제정에 이론적 뒷받침을 했다는 것이다. 이어 한글이 전대미문의 창조가 아니라 원나라 때 훈민정음처럼 한자음을 표시하려 만든 파스파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덧붙인다.

훈민정음이 우리말 표기로 쓰임이 확장되는 대목에서는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가 등장한다. 그녀는 변음토착(발음을 바꿔 토 달기)의 난제를 해결했다. '國之語音이 異乎中國하여…' 식으로 표시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세종은 수양대군에게 석보상절을 짓게 하고 스스로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이어 월인석보를 거치면서 우리말을 적는 '언문'으로 발전한 것이다.

노학자의 통찰이 담긴 전문학술서이지만 통념을 뒤집어 논증하는 대목이 흥미롭게 읽힌다. 제기된 논점은 앞으로 국어학계가 풀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그와는 별도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한글 포고문을 발표했을 정도로 순식간에 기층으로 파고 든 한글이 조선에 몰고 온 엄청난 사회변화다. 지배층의 언어, 즉 한문의 세계관과는 다른 사유의 체계를 갖게 된 '언문 공동체'는 더 이상 역사의 객체이자 통치의 대상에 머물지 않았다. 한글 공론장이 열어준 근대의 씨앗, 한글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정광 지음/김영사/508쪽/1만 9천800원.

김승일 기자 do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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