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위대한 연설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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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국 동서대 총장

최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한 교회에서 흑인을 향한 증오의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이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인 것이 알려지자 전 미국이 경악했다. 그렇지 않아도 경찰의 흑인에 대한 과잉 진압 사건이 다발해 인종 갈등이 심화되고 있던 터라 사회를 들끓게 하기에 충분했다. 희생자 장례식은 초긴장 상태에서 시작됐다. 추도 연설을 하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이 등단하자 모두들 그의 입을 주목했다.

인종 갈등 진정시킨 오바마 연설
민주주의는 설득의 예술 연설
하나가 역사 바꾸기도

막말만 판치는 우리 정치
국민의 관심 멀어지게 해
희망 주는 감동적 연설 필요하다


그는 진지하면서도 정제된 어휘를 사용해 미국은 결코 백인우월주의자의 범죄에 굴하지 말아야 하며 모두가 힘을 합쳐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은혜'에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고는 연단에 선 채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찬송가를 고요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증오감이 드리워져 있던 장례식장 분위기가 완전히 누그러뜨려졌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은혜'의 노래를 대통령과 함께 합창했다. "그가 우리 대통령이라서 다행이다"라는 칭송이 울러퍼졌고, 이 연설 이후 일촉즉발의 인종 갈등은 진정되기 시작했다. 연설이 반전을 일으킨 것이다.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 윈스턴 처칠 수상의 독일 나치스와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연설 등 많은 세계적 정치가는 연설을 통해 상대방을 설득하고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민주주의란 설득의 예술이고, '말'이라는 시장에서 각자 다른 주장이 경쟁하여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말이 승리하는 정치체제이다. 아무리 반대 여론이 지배적이라 하더라도, 대중의 마음을 흔드는 연설 하나로 일순간에 여론이 반전되어 역사의 흐름을 바꾸게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묘미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정은 그렇지 않다. 국민 입장에서 볼 때 정책에 관한 것이든, 정당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든 속 시원하게 정치인으로부터 설득력 있는 설명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물론 국회에는 대표 연설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원고를 맥없이 줄줄 읽는 수준이고 국민을 향한 호소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입장 표명에 그치고 있다. 국회라는 무대에 서서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세기의 연설을 하겠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으니 국민의 관심이 정치권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공무원 연금제도 개혁에 대한 논쟁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사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야 간 한판의 연설 대결이 없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요즘같이 소셜미디어가 발달된 시대에 멋지고 논리적인 연설이 있었다면 이내 인터넷상에서의 토론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그것이 점차 여론으로 수렴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네 정치권은 연설 대신 막말과 험악한 비난, 그리고 비아냥이 판을 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상에서도 감정적 대립과 막말이 오갈 수밖에 없다.

언론이 전하는 정치권 뉴스는 주로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의 대통령 모두 발언, 각 정당의 당직자 회의에서의 모두 발언, 그리고 대변인들의 브리핑이 중심이 된다.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것만 국민들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더구나 언론매체도 소비자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속성을 가지다 보니 정책에 관한 설명보다는 좌충우돌하는 발언 부분을 중심으로 보도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런 발언을 전해 들은 국민들은 혀만 차고 한숨만 쉴 뿐이다.

그러는 사이, 새로운 정책이 쥐도 새도 모르게 발표되기도 하고, 마음 맞는 국회의원 몇 명이 모여 뚝딱 새로운 법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공청회를 거치는 모양새는 취하고 있으나, 정책 입안자들에 의한 대국민 설명이 없는 상태에서 이해 당사자끼리의 주고받음만이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사회를 대혼란으로 빠지게 하는 사건이나, 정치적 위기를 맞는 상황이 발생할 때 정치인들의 '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진다. 국민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다시 용기를 내어 재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감동적인 연설은 사회 분위기를 일신케 할 것이다.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요지를 담은 세기의 연설과 함께 이에 따른 후속 조치가 이어질 때 국민은 비로소 슬픔을 뒤로 하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오랜 속담이 있다. 극적인 반전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언제쯤이 되어야 우리는 정치인의 멋진 연설을 들을 수 있을까. 국민은 감동적인 연설을 듣고 설득당하고 싶어 하기도 하고 또 그런 멋진 정치인을 배출한 데 대한 뿌듯함을 느끼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이는 지난한 기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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