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인생의 멘토-소설가 함정임 편] 보들레르·랭보·김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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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글쟁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하는 존재들

소설가 함정임 씨가 2012년 프랑스 샤를르빌 메지에르의 랭보 무덤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작은 사진은 그가 멘토로 꼽은 김윤식 문학평론가. 함정임 씨 제공·부산일보DB

처음엔 사랑처럼, 뜨겁게 왔다가 가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스무 살 어름부터 보들레르와 랭보, 플로베르 들을 밤낮없이 끼고 살았다. 이성복과 최승자, 기형도를 간헐적으로 탐독했다. 한 페이지 전후 조각글들을 쉼 없이 끼적거렸다. 그러나 누구의 영향으로 삼지 않았다. 여기(餘技)의 일종으로 생각했다. 문학, 그것은 내가 일생을 걸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사는 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것이었다. 청춘 시절이었던 만큼 오만과 오독, 치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런 내가 평생 문학을 업(業)으로 소설을 쓰고 살아가게 되었다. 청춘 시절의 무지가 저지른 죄의 벌과(罰課)를 톡톡히 치르고 사는 셈이다. 내 인생의 멘토는 소설을 쓰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나를 불편하게 하고, 부끄럽게 만드는 존재들이다.

보들레르·랭보·플로베르…
구름·신기루·문체의 아름다움 좇아
평생 괴짜로 살았던 인물들
그들 글 읽을 때면 불편하고 부끄러워

잡지사 기자로 접한 김윤식 선생
소설이라는 새 세계 열어준 주인공
이 땅의 살아있는 사람에게로
눈을 돌리게 만든 최초의 멘토


파리에 가면 찾아가는 곳이 있다.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가 묻혀 있는 몽파르나스 묘원이다. 조금 멀리 북동쪽 벨기에와의 국경도시 샤를르빌-메지에르로 향할 때도 있다. 바람 구두를 신은 사내 랭보가 그곳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어느 때에는, 북쪽 노르망디 루앙으로 내쳐 달려갈 때도 있다. '마담 보바리'라는 통속소설로 현대 소설의 새 장(場)을 연 플로베르가 그곳 모뉘망탈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그들은 떠도는 구름과 사막의 신기루, 문체의 아름다움을 좇아 평생 괴짜로 살았다. 후세는 이들 괴짜들을 일컬어 이방인, 또는 현대인이라 부른다. 대학 시절에 그들을 만나자마자 나는 그들이 거느린 이방인의 냄새, 현대인의 속성에 본능적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내가 그때까지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들이었다. 구름이나 신기루는 이리저리 흘러가는 유동성, 손을 내밀어도 잡히지 않는 덧없음을 속성으로 한다. 그 나이에 나는 왜 붙잡을 수 없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헛것에 열렬히 반응했던가. 그들의 문장을 읽을 때면,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아찔하고, 숨 쉬기가 불편했다. 거울 속의 내 얼굴, 미세하게 떨리는 내 손바닥, 무한처럼 펼쳐진 백지(白紙)와 마주하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안의 불편함과 부끄러움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해준 사람은 문학평론가 김윤식 선생이다. 나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광화문에 있는 월간 '문학사상'의 기자로 입사했다. 당시 선생은 매달 발표되는 소설들을 대상으로 월평(月評)을 썼다. 한국 문학 담당 베테랑 기자가 선생의 글을 받고 편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수습을 겨우 뗀 내가 선생의 월평 담당자로 고정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선생이 읽고 있는 것을 따라가느라 매일 밤을 새웠다. 선생의 속도를 따라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선생이 월평을 쓰기 전에 내게 들려주시던 소설과 의미들, 월평 행위와 나란히 매일 매일 연구하시던 작가와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임화를 알게 되었고,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헤아려 볼 수 있었고, 김동리의 샤머니즘적 체질과 구경적(究竟的) 세계관을 엿볼 수 있었다. 그때 1년은 대학 4년 동안 내가 쏟았던 불문학 전공의 총량을 능가했다. 그때 내가 만난 선생은 이미 국문학계의 거목이었다. 그 어떤 세속적인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초인간적인 의지,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소설 읽기, 범접할 수 없는 성격과 아우라. 선생은 한국문단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전설적인 인물로 통했다. 괴물이라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선생 곁에서 나 역시 괴물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읽고 또 읽어야 했기에, 잠은커녕, 밥알을 씹고 삼키는 것조차 시간이 부족했다. 보들레르니 랭보니, 플로베르 등으로 꽉 들어차 있던 내 머릿속은 한국 소설들, 매일 매일 발표되는 현장 소설들이 치고 들어와 점령했다. 그들과 동고동락하는 사이 나도 그들처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시험해보기 위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투고작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신춘문예 두 곳에서 동시에 뽑혔다. 데뷔작 '광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김윤식 선생은 내게 소설이라는 놀라운 세계를 열어준 장본인이시다. 그때까지 나를 사로잡고 꼼짝 못 하게 했던 도서관 서가의 영혼들-보들레르, 랭보, 울프, 프루스트, 카프카, 블랑쇼, 베케트, 바르트라는 외국문학사의 멘토들로부터 처음으로 나와 똑같이 뜨거운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이 땅의 살아 있는 사람으로 눈을 돌리게 만든 최초의 멘토이다. 소설가가 된 이후, 선생은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함께하셨다. 어쩌다 생(生)을 놓고 싶을 만큼 불가항력적인 고비에 처했을 때에는 목숨과도 같은 조언을 해주시며 다시 살아나가도록 이끌어주셨다. 메뚜기나 기린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것도 문학을 본업으로 살아갈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깨우쳐주신 분, 그리하여 지금의 나, 그러니까 소설 창작자와 편집자에 그치지 않고 연구자와 교육자의 길을 가도록 독려해주신 분도 선생이셨다. 오만의 극치로 무장한 천둥벌거숭이로 선생을 처음 만났던 스물네 살 봄의 불편함과 부끄러움이 강물이 되어 어느덧 오늘에 이르렀다. 아득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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