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호기자의 피플&]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주동 문부식 격월간 '말과활'기획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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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만의 첫 발걸음… 이젠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문부식 주간은 옛 미문화원 앞에서 사진 찍는 것은 피하고 싶다고 말한다. 희생자에 대한 마음의 짐이 아직도 크다. 사진은 인근 중앙성당. 천주교는 당시 문 주간 구명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작은 사진은 당시 화재 모습. 김병집 기자 bjk@

"거의 33년 만에 처음으로 이곳을 찾아온 것 같네요. 사람들은 저를 이 건물과 쉽게 결부시켜 떠올리지만 제가 여기까지 오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이곳은 저나 동료들의 인생이 바뀐 곳이고 그날 희생자가 있었던 탓에 다시 마주하기 주저했던 것이지요. 언젠가 소설가 최인훈 선생께서 너무 종교적인 자책 속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니냐고 하셨지만, 거리를 두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80년 광주항쟁 진상 알리고
美 방조·묵인 책임 물으려 실행
예기치 못한 희생에 자책감

가톨릭서 당시 구명 운동 적극적
사형 확정 됐지만 집행 면해
'동의대 사건' 인터뷰로 마음 고생

지금은 학습공동체 '가장자리'
인문사회 비평지 '말과활' 발간 몰두
내몸에 꼭 맞는 옷 걸친 느낌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부미방) 주동자 문부식(56·격월간 '말과활' 기획주간) 씨를 지난 1일 부산 중구 대청동 미문화원(현 부산근대역사관) 인근에서 만났다. 부미방은 당시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80년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고 미국 측의 방조·묵인에 대한 책임을 추궁한 사건이다. 자수한 고신대생 문 주간·김은숙 씨를 비롯, 15명이 검거됐다. 올해는 부미방 33주년, 광주민주화운동 35주년이다. 당초 3월 초 만나기로 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연기됐다. 문 주간은 이날 지인이 준비하는 인문카페 공간을 둘러볼 겸 부산에 왔다.

"그날따라 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경고 수준에서의 상징적인 방화가 목적이었는데 휘발유 화력이 너무 셌던 것 같습니다. 당시 미문화원 건너편 건물에 올라가 사진을 찍었지요. 정권이 사건을 덮을까 봐, 증거로 남기려 했던 것입니다. 은폐할 경우 유인물과 함께 외신 등에 넘겨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문 주간은 그 시대는 그만큼 절박했다고 설명한다. "부미방 이전, 80년 12월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는데 관련자를 수배하고 검거하려 했으면서도 사건 자체는 단순 실화로 매듭지어 버렸던 적이 있었다"며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그 나름대로 준비를 면밀히 했다고 말한다. 인근 유나백화점과 국도극장 2곳에서 방화 이유를 적시한 유인물을 뿌리며 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렸다. 결과적으로 사상자가 생기는 바람에 사건이 생각보다 커져 버렸다고.

"당시엔 광주의 비극에 미국이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동시에 그저 맹목적으로 미국을 우방으로만 생각하는 우리 사회에 각성을 촉구하고 인식 변화를 바랐던 목적도 있었지요. 아무튼 긴 시간을 거치면서 미국의 실체를 조금씩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요."

이런 이유로 부미방은 80년대 뜨거웠던 반미운동의 효시가 됐다. 문 주간은 "81년 말부터 미국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 같다"고 밝힌다. 광주 이전과 이후가 같을 수 없다는 인식과 함께 당시 부산에서도 부림사건 등으로 많은 대학생이 검거되던 시기여서 더욱더 그 상황을 돌파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부산일보DB
"78년 고신대서 유인물을 뿌리다 강제휴학을 당했고 80년에 복학했습니다. 부마항쟁을 거치면서 학내 분위기가 확 바뀌어 있었지요. 그런데 광주 이후 상황이 캄캄하니까 다른 학교 학생들과 만나 타개책을 모색하게 됐고 부산대·부산여대(현 신라대) 학생들과 공부모임을 만들게 됐습니다. 특히 광주에 대한 부채감이 컸는데 광주 관련 수배자 김현장 씨와의 만남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문 주간은 당시 초량YMCA에서 야학 교사로 참여했다. 한 선배가 김현장 씨를 소개해 줘 자신의 자취방에서 한동안 함께 지냈다고 한다. 르포작가였던 김현장 씨를 통해 광주의 진상을 알게 되고 실패로 끝난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듣게 됐다고. 이를 인연으로 김현장 씨와 원주에서 한 차례 공부모임을 하기도 했는데 당시 지학순 주교가 있는 원주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다고 한다.

"대구교도소에 있을 때 추기경께서 예고 없이 면회를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와 김은숙 씨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줬다는 혐의로 원주교육원장 최기식 신부까지 구속되어서 가톨릭 측이 상당히 화가 나 있던 상태였지요. 변호사 한 분이 그러더군요. 가톨릭과 연계된 것이 사형을 당하지 않게 된 결정적이 이유가 아니겠느냐고요. 광주로부터 2년도 채 되지 않은 그 시절엔 마음만 먹으면 집행할 수도 있었겠지요."

문 주간은 "처음 1, 2심에서는 사형 선고를 받아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고. 그런데 대법에서 확정 판결을 받으니까 비로소 두려움이 엄습하더라고 말한다. "아,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실감이 왔단다. 서울서는 이돈명·황인철·홍성우 변호사, 부산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광일·이흥록 변호사가 변론을 맡았다.

"신학 공부를 선택하게 된 것은 불화가 끊이지 않는 집안 분위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다툼이 많았지요. 육사 8기인 아버지를 포함, 아버지 형제 네 분이 육사 출신인 환경과 그다지 친숙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우연히 교회에 간 뒤 안정감을 찾게 되었지요. 교회 공동체의 다정함과 기독교적 메시지가 주는 울림이 컸습니다. 막상 신학대학에 진학해서는 실망의 연속이었지요."

문 주간은 요즘은 지난 2013년 7월부터 홍세화('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저자) 씨와 함께 시작한 학습공동체 '가장자리' 협동조합(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일과 인문사회 비평지인 '말과활'(격월간 잡지) 내는 일을 하고 있다. 97년 계간지 '당대비평'을 창간한 이후 두 번째 출판 관련 일이다. 출판 동네 안에서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기획을 하는 게 적성에 맞는 것 같단다.

"2002년 동의대 사건 관련 조선일보 인터뷰 등으로 변절했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10년 동안 긴 침묵의 시간을 보냈지요. 활자의 세계로부터 떠나 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 보자 해서 목공일·편의점 알바 등 여러 가지를 해 보기도 했습니다. 결국 다시 출판과 잡지 일로 되돌아오니 몸에 맞는 옷을 걸친 것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입니다."

문 주간은 신자유주의적 야만의 구조에서 개별화·황폐화된 삶을 살아가는 개개인들이 존재에 대한 불안감으로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학습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한다. 가장자리 협동조합의 조합원은 2년 사이 500명을 넘었다고. 가장자리는 점과 점으로 남아 있는 개인과 개인을 이어주는 선이자 새로운 생각의 주체들이 생겨나는 장소라고 설명한다. 가능하다면 서울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생겨날 수 있도록 지역 출판사나 인문공간 등과 연계, 활성화시켜 볼 계획이라고 덧붙인다.

"이제는 부미방이란 과거의 사건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심정입니다. 현재적 해석을 기다리는 사건으로 남겨둔 채 말이지요. 민주화 이후 우리는 한편에선 말의 범람, 다른 한편에선 말의 지독한 빈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말이 공허해지지 않으려면 함께 공부하고 함께 삶의 공동성을 발견해가는 길밖에 없지요.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서, 삶의 최전선인 이곳에 머물며 '말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앞으로 제 삶의 과제일 것입니다."

soney97@busan.com

문부식 주간은

1959년 부산 출생. 77년 고신대 신학과 입학. 79년 강제 휴학. 80년 고신대 3년 복학. 82년 3월 18일 오후 2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82년 4월 1일 도피 14일 만에 자수. 83년 3월 대법원 사형 확정. 88년 12월 석방. 93년 첫시집 '꽃들' 출간. 97년 계간지 당대비평 창간. 2002·2003년 조선일보 인터뷰 등 파문. 2011년 12월 진보신당 대변인. 2013년 7월 격월간 '말과활'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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