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에세이] 아아! 무정
나이 지긋해 좋은 운동이자 소일거리는 동네 뒷동산 걷기다. 돈도 안 들고 거창한 등산 장비도 필요 없으며 게다가 '삼식이' 누명도 벗을 수 있기 때문이다.
뒷동산 걷기가 소일거리인데
곳곳에 "내 나이가 어때서" 소음
무심·무정에 익숙한 게 나이 듦
요즘엔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산길을 잘 정비해 놓았고 금상첨화로 비싼 운동기구까지 마련해 두었으니 이런 도피안이 따로 없다.
그런데 갈수록 걷기가 만만치 않다. 오솔길을 질주하는 산악자전거에다 요즘엔 오토바이까지 가세하니 자칫 비명횡사하기에 십상이고, 물소리 새소리 찾아간 길엔 일렬횡대로 길을 막고 전진해 오는 경상도 아지매 왁자지껄에 혼이 쏙 빠진다.
오죽했으면 고려 때 우리 지방으로 귀양 온 정포(鄭)란 이가 "아낙네 떠드는 소리 새 지저귀는 것처럼 시끄러워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도 없네"라고 탄식하는 시까지 지었을까.
그러나 최고의 가관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틀어대는 라디오 소리다. 있는 대로 볼륨을 높이는 데다 질세라 따라 부르기까지 하니 도무지 견뎌낼 재간이 없다.
한번은 어떤 사모님께 불평 겸 충고를 건넸다가 "웃기네. 할아버지, 갈 길이나 가세요"하는 수모까지 당했다. 뺨따귀 안 맞아 다행이라 자위해 보건만 마음이 영 불편하다.
요즘 라디오 소음의 압권은 단연 "내 나이가 어때서"다. 평균수명 아흔이 머지않은 지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인생 이모작을 부르짖는 대중매체의 선동과 잘 어울려 박스오피스 단연 1위다.
말하자면 사위어 가는 춘정의 불씨를 후후 불어 모닥불을 피우겠다는 의미인 모양인데 과연 잘 될까. 나이 들어 연정이 도를 넘으면 패가망신이요, 열정이 지나치면 급사하기 쉽다고 동의보감에도 나와 있다.
정(情)은 원래 고요한 본성이 외물을 만나 흔들린 상태라고 주자는 말했다. 따라서 정은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 정의와 평등을 향한 열정은 사회를 진보시키고 피붙이에 대한 애정은 가족을 단결시킨다. 그러나 빗나간 욕정은 토막 살인을 불러오고 분노의 격정은 인간성을 파괴한다.
정을 뗀다는 말이 있다. 현명한 옛사람들은 세상을 하직할 때라는 예감이 들면 사립문을 닫아걸고 지음(知音)의 벗조차 관계를 끊었으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까지 보기 싫다고 위악(僞惡)의 선언을 했다. 이승과 저승의 길이 다르고 삶과 죽음의 논리가 구별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럭저럭 이럭저럭 살아온 나에게도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육친과의 영원한 별리 앞에서도 눈물 한줄기로 슬픔의 정을 대신하는 일이요, 스스로의 죽음 앞에서도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들으며 무심하게 떠나는 것이다.
무심(無心)은 곧 무정(無情)이다. 정은 이승의 논리지만 무정은 초월의 논리다. 나이 든다는 것은 무심과 무정에 조금씩 친근해지는 게 아닐는지.
그래서 도연명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말미에 "애오라지 자연의 이치를 따라 살다 돌아가매 / 다시 또 무엇을 의심하리"라고 갈파했을 것이다.
온 천지에 피어난 진달래와 벚꽃이 사람의 정을 마구마구 뒤흔들어 놓는 이 사월에 나도 꽃 잔치 핑계 삼아 경주 토함산 불국사 지나 석굴암 부처님 뵈러 가는 산길을 올라 보련다.
거기 청마의 시 한 구절이 무정한 바윗돌에 새겨져 있다. "하마도 터지려는 통곡을 못내 견디고 / 내 여기 한 개 돌로 적적히 눈 감고 가부좌 하였노니."
김성언
동아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