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체득한 문장 진심으로 쓰는 데 겨우 이르렀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함정임 소설가가 해운대 달맞이의 한 카페 야외 테라스에서 여덟 번째 소설집 '저녁 식사가 끝난 뒤' 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병집 기자 bjk@

떠들썩했던 등단 이후 25년. "소설가가 되길 잘 했냐"는 질문에 작가는 "이제야 산문으로 자유를 느낀다"고 했다.

소설가 함정임 여덟 번째 소설집
단편 8편에 상실의 기억 담아
"이제야 산문으로 자유 느껴"


소설가 함정임(51·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의 자의식은 오랫동안 시인이었다. 그는 "소설은 온몸으로 체득하며 살지 않고는 한 문장도 진심으로 나오기가 어렵다. 멋지게 쓰려하기보다는 이제 그 세계에 겨우 이른 상황"이라고 했다. 굴곡진 삶을 치열하게 헤쳐와 이제야 이른 웅숭깊은 세계. 그래서 그는 "산문시대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하지만 소설가란 이름은 이미 25년 전 문단에 파란을 일으키며 그에게 '날아들었다'. 보들레르에 깊고 예리하게 꽂혀 있던 불문학도는 월간 문학사상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동안 읽지 못했던 한국 문학 작품을 읽어내느라 수없는 밤을 지새웠다. 1989년 12월. 문학사상 초년병 기자는 생애 처음으로 쓴 단편소설 '광장으로 가는 길'을 '정윤'이란 필명으로 사무실 주변 5개 신문사 신춘문예에 투고한다. '광장으로 가는 길'은 '새가 날아가는 것만 봐도 최루탄이 날아오는 듯해 움찔하던 지옥 같던 시절', '광장'과 '밀실' 사이에서 죄책감을 느끼며 대학 시절을 보낸 주인공이 되짚는 '회상의 길'이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함정임

결과는 5개 신문사 동시 당선. 신춘문예 일정이 가장 빨랐던 동아일보의 수상작 사전 통보로 경향·중앙·서울신문은 결과 발표 전 합격을 취소했지만 사전 통보 '배달사고'로 당선을 확정했던 조선일보는 동아일보와 기 싸움을 벌이다 발표 후 자격 박탈을 했다.

느닷없이 등장한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은 격려와 질타의 중심에 섰다. 첫 단편소설이 거둔 뜻하지 않은 논란과 파장에 '신인 5관왕'은 '무서워서' 6개월간 글도 쓰지 못하고 '자숙'했다.

그는 최근 여덟 번째 소설집 '저녁 식사가 끝난 뒤'(문학동네·사진)를 냈다. 소설집 '곡두' 이후 5년 만이다. "행복한 것은 소설이 되지 못한다"는 그의 말처럼 이번 소설집에 실린 8편의 단편도 참 쓸쓸하다. 표제작 '저녁 식사가 끝난 뒤'는 4년 전 작가가 프랑스 루르마랭에 있는 알베르 카뮈의 무덤에 다녀오는 길에 문자로 박완서 선생의 부고를 받았던 상황을 모티브로 쓴 작품이다. 함 작가가 '작가세계' 편집장으로 있던 때부터 인연이 각별해 어머니 같던 고 박완서 작가를 소설은 P선생이라 일컬어 추모한다. 소설집엔 대부분 쓰라린 상실의 기억을 안고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한 사람의 영혼에 뻥 뚫려 있는 구멍은 다른 사람의 상실감과 만나기도(어떤 여름) 한다.

작가는 "세월호 참사 이후 글 쓰는 이들은 쓰기와 연구를 통해 '애도'를 해 왔고, 그래서 소설 쓰기 역시 추모의 형식 이외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여행과 요리를 즐기는 노마드 소설가. 어떤 이들은 그를 '팔자 좋은 여자'라고도 하지만 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첫 남편 소설가 김소진을 결혼 4년 만에 췌장암으로 떠나보냈고, 그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아들은 생사의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기며 고교 시절을 병원에서 보냈다. '이 아이를 살아있게만 해 달라'는 애끊는 기도의 와중에도 그는 강단에 섰고, 대학원생들을 위한 연구 모임 '미필담'을 이끌고, 신문사 신춘문예 심사를 하고, 청탁받은 원고들을 써내야 했다. 숨은 상처가 녹아 있는 그의 소설은 그래서 아프다. 2006년 3월 부산으로 이주해 해운대 달맞이 주민으로 산 지 9년여. 여전히 분주한 그는 틈틈이 은희경, 편혜영 등 작가들을 부산으로 오라고 꼬드기고 있다.

강승아 선임기자 seung@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