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제 나이만큼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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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원 영화평론가

"이 영화는 팔십 먹은 노감독이 그 세월로 바라본 세계입니다." 영화 '화장'의 부산 시사회에서 임권택 감독은 자신의 신작을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 사회가 여든 나이의 시선을 궁금해할까? 대중의 관심을 모으는 데에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언급이지만 그 발언이 임권택 같은 거장의 것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는 언제나 "나이만큼, 살아온 삶만큼 나오는 게 영화"라고 믿어 왔고, 또 자신이 50여 년간 만든 102편의 영화가 펼쳐 낸 가늠하기 힘든 그 스펙트럼도 제 나이로 간명하게 설명해 내는 감독이다.

임권택 감독 '화장' 시사회 말 여운
"팔십 먹은 그 세월로 바라본 세계"
치욕과 욕망 점철된 삶 그대로 담아
세월, 삶의 단언 하나씩 지우는 과정


"그러니까 나이만큼, 나는 나이 이상도 이하도 찍은 적이 없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영화에서 그 감독의 나이를 읽어 줬으면 좋겠고, 그걸 보려고 노력해 주었으면 좋겠어요"라는 그의 말은 나이를 내세우는 노감독의 허언이랄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존경을 표한답시고 "그 연세에 대단하십니다" 따위의 말이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오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그런데, 영화가 나이만큼 나온다는 건 무슨 뜻일까? 단순히 연륜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나이만큼'이라는 말.

위대한 예술가를 단지 산술적인 나이를 앞세워 설명하는 일은 다소 천박한 일이지만, 나이를 빼놓고 서두를 풀기 어려운 또 한 명의 감독이 있다. 지난 2일, 106세의 나이로 타계한 포르투갈의 거장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가 그렇다. 그는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감독은 아니지만 현존하는 최고의 감독을 꼽을 때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국제적인 거장이다.

무성영화기에 경력을 시작하여 7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작업에 나선 이례적인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명성을 나이로 얻었을 리 없다. 제 할아버지라도 되는 양 어느 순간부터 전 세계 영화인과 시네필들이 일제히 손가락 모아 그의 나이를 카운트하기 시작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건재해 보였고 심지어 작품은 점점 더 훌륭해졌다. 지구 상 어디나 엇비슷할 가혹하고 고단한 영화 현장을 떠올리면, 올리베이라는 그 자체로 미스터리이자 전설이라 할 만하다. 우연찮게도 올리베이라에 관한 부고가 도착하기 불과 이틀 전, 영화의전당에서 본 그의 영화 '아브라함 계곡'은 이러저러한 생각을 불러왔다.

임권택과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며칠 간격으로 만난 그들 영화를 관통하는 단어가 '욕망'인 것은 의외다. '아브라함 계곡'에서는 한 여성을 둘러싸고 여러 남성의 욕망들이 뒤엉켜 있었고, '화장'에선 죽어가는 아내 곁에서 젊은 여성을 가슴에 품은 중년 남성의 욕망이 숨죽이고 있었다.

나이만큼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 적어도 세상사에 달관한 고승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겠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에 담긴 치욕과 그 삶에 끈질기게 따라붙는 욕망이 인간의 근원적 조건이라는 걸 조용히 수긍하고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서 감독의 나이를, 그 연륜에서 온 깊이를 얼핏 보았던 듯도 하다. 특히 '화장'이 그랬다. 여기에는 처연한 충동과 서글픈 체념 사이에서 우리를 문득 멈춰 세우는 순간들이 있다. 그 끝에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흥이 일었다.

돌이켜보면, 이들 노감독은 단 한 번도 구름 위에서 관조하듯 인간을 내려다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영화에서 삶의 비밀이 여기 있다는 투의 확언이나 구원과 희망에 대한 확신을 발견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차라리 그들은 불안하고 모호한 시선으로 영화를 온통 질문으로 가득 채우는 편을 택하곤 하였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삶에서 단언해 왔던 것들을 하나씩 지워 나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이렇지만, 삶의 각 국면을 '나이만큼' 살아냈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여전히 잘 가늠되지 않는다. 그조차 나이만큼이라 한다면, 온전한 이해에 이르지 못한 것도 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떨쳐지지 않는 생각은 어쩌면 우리는 임권택 같은 노장을 두 번 다시 가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고령화 사회의 아이러니랄까, 지금 우리는 나이듦이 아무런 존중의 표지도 되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는가. 고령층이 사회적 부담으로만 인식되는 사회에서 '나이만큼'의 예술을 기대하기란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맥락은 좀 다르지만, 관객 반응이 이렇게 궁금하기는 처음이라는 임권택 감독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세대 간의 소통에 기대를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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