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폐사지를 찾아서] 4. 원원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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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빽빽한 절터엔 아름다움만 홀로

원원사는 신라 호국사찰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록 상처를 받았지만 원원사지 3층 석탑은 아직도 천년의 향기를 머금고 있는듯 하다. 이재호작가 제공

원원사지는 신비한 울림이 오는 폐사지다. 산속 깊숙이 들어앉아 속세와는 절연된 처연한 고독미가 어려 있는 듯하다. 예전에는 7번 국도 모화역(毛火驛) 옆의 굴다리 지나 돌담길 정겨웠던 마을을 돌고 돌아 낭만과 가슴 벅찬 마음을 안고 찾았던 곳이다. 행정구역이 경주라도 울산과 경계 지점이라 외진 곳이고, 차도 못 들어가 문화유적을 찾는 고수들만 찾았던 가슴 찡한 절터였다. 더구나 경주에서 울산 가는 7번 국도는 신라 시대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당나라 유학승과 사신, 상인들이 반드시 지나야 되는 통로라서 긴장이 흐르던 곳이다. 산 너머 신흥사도 승병과 관련이 있고, 낭산 옆의 사천왕사나 여기 원원사도 신라 호국사찰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주·울산 경계 외진 숲 속
문화유적 고수들만 찾았던 절터

옛길·옛마을 사라져 쓸쓸함 더하고
현대식 사천왕상 생경함에 괴로워

돌계단 오르니 조용히 반기는 석탑
소나무와 어우러져 조화 이루고

신라시대 호국사찰이 물어 오네
어떻게 살고 또 죽어야 하는가…

■어지러움과 아름다움

가능한 옛길을 택하여 천천히 차를 몰았다. 오래된 트럭이나 어울리는 길이었지만 집집마다 돌담의 독특한 정취는 온데간데없어 아쉬운 마음이 밀려왔다. 겨우 몇 집이 있었지만 공단 주위라 정리 안 된 어수선함이 어지러웠다. 지명대로 불(火)과는 인연이 많은지 쉼 없이 털(毛)대신 쇠가 타고, 불고기 단지에서는 숯불에 고기가 익고 있었다.

깊은 산골의 아름다웠던 호수도 대규모로 만들어지며 옛길은 사라지고 산 중턱으로 길이 나 있다. 절로 오르는 입구에는 좌우에 금강역사상, 절 마당에는 사천왕상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 성의 없이 기계로 조잡하게 만들어 사천왕도, 보고 있는 나도 괴로웠다. 우리시대에 만든 원원사의 '천불보전' 건물도 생각 없는 공장 건물 같다. 산세와 공간에 맞게 아름답게 만들 수 없었을까. 우리나라 대부분의 중창불사는 안목 안 되는 스님과 크게 지어야 돈이 되는 업자의 합작품이다. 그래도 멀리 떨어져 있는 해우소 가는 길은 볼만했고, 요사채의 정겨움은 괜찮아 그 옆 수조에 흐르는 물 한잔을 마시고 곧장 원원사지로 올랐다.

■속세와 극락

불과 몇 발자국 옮겼는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고요한 적막이 엄습해오고 속세의 찌꺼기는 일시에 사라진다. 옛 정감이 묻어나는 울퉁울퉁한 돌계단을 가파르게 오르자 말없이 반겨주는 절터의 분위기는 눈물이 날 정도의 고독한 아름다움을 흘리고 있었다. 이리저리 휘어져 꿈틀대며 서 있는 소나무 사이에 상처 입은 석탑, 갑자기 가슴이 울컥하고 먹먹해진다. 서산에 지는 해도 갈 길을 멈추고 상처 입은 석탑을 고운 햇살로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천천히 이리저리 걸었다. 입구에 큰 소나무가 수문장처럼 서고 그 앞에는 석등, 좌우에는 쌍탑이 서 있다. 금당 터는 기둥은 사라지고 오히려 소나무만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 원원사지 소나무와 석탑의 환상적인 조화는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황홀하고 아름답다.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신라 시대 우물이 예전 모습그대로 물이 퐁퐁 소리 내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물은 인간이나 동식물에게 생명이다. 신라와 우물은 관련이 많다.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정(BC 69년)부터 알영왕비의 탄생 설화인 알영정, 김유신 생가의 재매정, 분황사의 석정 등. 경주 읍성 안에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70여개가 있었으니 가히 우물의 나라, 생명의 나라이다.

아무도 없는 해질녘, 절터가 주는 말 못할 아름다움에 한참을 취했다. 지는 해도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넘어가 버렸다. 이처럼 산사의 겨울 폐사지는 쓸쓸하면서도 마음 시린 울림을 준다.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되는가, 진정한 행복과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끊임 없이 되묻고 있다.

■수난의 상처

신라는 삼국을 평정한 뒤에 사천왕사를 비롯하여 부석사, 원원사 같은 국가 수호의 호국사찰을 국방의 요충지에 많이 짓는다. 원원사지도 밀교 계통의 안혜, 낭융 등의 승려가 김술종, 김유신과 의논하여 건립했다. 석탑을 보면 건립한 사람들보다 아무리 빨라야 1백 년 뒤의 양식이다. 건립 당시에 목탑을 세웠다가 다시 석탑을 세웠거나 아니면 탑 없이 절을 세웠다가 석탑은 뒤에 세웠을 것이다. 감은사지(682년) 석탑이 쌍탑의 시초이고 불국사의 석가탑(751년)이 완결품이다. 석가탑 이전까지는 지대석이나 탑신에 사천왕이나 팔부중상, 12지 신상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유추해서 알 수 있다. 이 쌍탑은 아무리 빨라야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시대인 것이다. 서탑은 심하게 상처를 입었고 사천왕상이나 12지 신상도 동탑보다 못하지만 연민의 정은 더 갔다. 그래서인지 여러 소나무 중 제일 기품이 넘치는 붉은 소나무가 마치 용처럼 휘어져 서탑을 호위하면서 감싸고 있는듯했다. 하물며 말 못하는 소나무마저 상처 입은 석탑을 어루만져 주는데 고등동물이라는 인간만이 욕심을 제어하지 못해 몹쓸 짓을 한다. 인간은 공존과 상생은 말로만 떠들고, 동·식물 무생물 모두를 필요에 따라 작살내거나 멸종시켜버리지 않는가. 하느님이 벌을 준다면 아마도 인간에게 가장 크고 가혹한 벌을 줄 것이다.

논가에서 신음 중인 원원사지 석조.
'왜 갑자기 원원사의 명부전 벽면 밧줄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불쌍한 인간이 떠오를까? 꿀맛에 취해 아래는 뱀이 혀를 날름거리고, 절벽 위에는 코끼리가 떠밀 자세로, 밧줄 위에는 쥐가 밧줄을 갉아먹고 있는 것도 모르고….'

이 절은 불국사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불타고 언제 세웠는지 모르지만, 인조 8년(1630)에 중수하고, 효종 7년(1656)에 불탔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사연은 기가 막힌다. 순조 9년(1809) 울산 사는 이 모 씨가 자기 조상 묘를 쓸려고 여기 석탑을 무참하게 무너뜨렸다. 잡초에 묻히고 잊혔다가 1927년 불국사 인근에서 여관을 하던 스기야마 씨가 사냥하려 가서 우연히 탑 일부를 발견하고 조선총독부에 보고한다. 총독부 촉탁 코유 씨가 원원사 탑임을 확인하고, 1929년 노세 우시조 교수에 의해 수습되어 1931년 경주유적보존회서 두 탑을 복원하여 오늘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 씨들 묘가 금당 터 앞뒤에 연이어 있는 것이다. 후손이라면 최소한 절터 안에 있는 2기의 묘는 빨리 옮겨주는 것이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절터 뒤 수수한 고려 시대 부도 탑에 오르다 날이 저물어 발길을 돌렸다. 입구 계단을 내려와 왼쪽으로 150여m쯤 걸어가니 신라 시대 석조가 미나리 밭 가에 온몸으로 뒹굴며 신음하고 있다. 발길을 돌리기가 상처 입은 원원사지만큼 무거웠다. kjsuojae@hanmail.net



이재호


기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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