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 보도블록이 누워서 말을 건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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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승강장 입구에/학교 앞 횡단보도에/엘리베이터 앞에/말이 누워 있다/-지하철 승강장이니 조심하세요/-오른쪽으로 가면 길을 건널 수 있답니다/-엘리베이터를 타려면 여기로 오세요/노란색/따스한 말이/올록볼록 누워 있다/까만 안경 낀 아저씨/지팡이 끝으로/말을 듣고 있다.'('누워 있는 말')

때로 우리는 이 '누워 있는 말'을 무심하게 밟고 지나간다. 이 '올록볼록 한 말'이 시각장애인들에겐 절대 놓쳐선 안 될 '따뜻하고 소중한 말'이란 걸 잊은 채.

박선미(사진) 동시인이 이런 무심함을 일깨우는 따뜻한 동시집 '누워 있는 말'(청개구리·사진)을 내놨다. 시인은 "세 번째 집을 지어 세상에 내놓는데, 이 시집이 정말 '마음이 헐벗은 어린이들을 따스하게 안아 줄 수 있는 집'이면 좋겠다"고 했다.

따뜻한 시선의 세 번째 동시집
일상 속 '소중한 존재'에 주목
"영혼 헐벗은 어린이 안고파"


시인의 따뜻한 눈길은 조손 가정 어린이의 외롭고 고단한 마음('얼음' '처음 알았다' '화산')에도, 로드킬 당한 아기 너구리에게도 짠하게 머문다.

'우리 가족/즐겁게 여행 가는데/고속도로 한가운데/너구리 한 마리/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중략)/아기 너구리 찾아 울고 있을/너구리 엄마가 떠올라/(…길 건너는 아기 너구리를 치고 달아난 뺑소니 자동차 보신 분을 찾습니다)/너구리 엄마 대신/현수막 걸어 주고 싶다.'('목격자를 찾습니다' 중)

박선미/ 누워 있는 말
나만 생각하는 삶이 아닌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을 지향하는 시인의 고민과 반성은 동시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어린이의 눈으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분노도 전한다. '우리 반은/감정 일기쓰기가 숙제이다/…(중략)/2014년 4월 16일 이후/내 일기 제목은/놀라다/걱정스럽다/안타깝다/답답하다/슬프다/불쌍하다/비참하다/어이없다/괘씸하다/원망스럽다/미안하다/./././하늘은 맑고/햇살은 따뜻한데도/내 일기 제목은/아직도/흐리다.'('아직도 흐림')

노원호 동시인은 박 시인의 이 시집에 대해 '사람이 해야 할 도리가 무엇이며 참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시로 명쾌하게 보여준다'고 했다.

'할머니 손때 묻은/장롱을 내보내고/바닥에 남아 있는/자국을 보았다/시간이/서 있던 자리/돋아나는 그리움'('빈방') 어린이들을 위한 동시집이지만 어쩐지 어른들에게 더 큰 위안을 준다. 알고 보면 '모든 도리는 하나'이고, 진심은 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박 시인은 1999년 부산아동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고, 200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됐다. 그의 동시 '지금은 공사 중'(6학년 1학기) '우리 엄마'(4학년 2학기)는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다.

강승아 선임기자 se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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