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인생의 멘토-인제대 서울백병원 장여구 교수 편] 할아버지 장기려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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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보다 큰 가르침 '내가 베풀면 나 자신이 더 행복해진다'

1980년대 초 인제대 부산백병원 내과·외과 합동 콘퍼런스에 참석한 장기려(앞줄 가운데) 박사.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중요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많은 갈등과 선택의 기로에 선다.

특히 외과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중요한 결정의 순간들을 더 자주 접하게 된다. '말기암 환자에게 계속 약물 치료를 해야 하나? 편안한 여생을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수술 중 전이된 암 세포를 과연 어디까지 절제해야 하나?'…. 이때마다 나에게는 떠올리게 되는 인생의 멘토가 있고, 그럴 때마다 조언을 해주고 더 나은 길로 이끌어 줄 멘토가 있다는 것이 얼마다 다행인지 모른다. 중요한 결정의 순간마다 '이분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셨을까'를 생각해보면 의외로 쉽게 해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 외과의사로 명성
삶의 가치 후손에 남겨

'환자 불쌍히 여겨라' 등
의대 합격하자 3가지 조언

할아버지 가르침 실천하려
9년 전부터 해외 의료봉사


나의 멘토는 바로 나의 할아버지이시며 '한국의 슈바이처'로 알려진 장기려 선생님이다.

중앙대 의대에 합격하게 되자 할아버지는 부산에서 급하게 올라오셔서 크게 칭찬해 주시면서 의료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세 가지의 조언을 주셨다.

첫째로 '항상 공부하고 노력하는 의사'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방학이면 복음병원에서 근무하시는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기 위해 짐을 꾸려 부산으로 내려가곤 하였다. 항상 할아버지는 책을 읽고 계셨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인체의 장기들이 그려진 책을 보신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께서는 그날 수술할 내용을 책이나 저널을 통해 다시 한 번 공부하셨던 것이었다. 시간이 있으실 때마다 의학 서적 등 항상 책과 가까이 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이 가르침은 나에게 아무리 바빠도 수술 전 짧은 시간이라도 내어서 수술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습관이 되었다.

둘째로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단적인 예로 할아버지께서는 수술 중 불가피한 절개로 환자에게 합병증이 생겨 보행 장애가 발생하자, 본인의 실수라고 인정하고 환자에게 용서를 구한 후 장애가 생긴 환자를 평생 돌보아 주셨다.

셋째로 '환자를 불쌍히 여기는 의사'가 되라고 말씀 하셨다. 의대를 졸업하고 수련의, 전공의 과정을 지내는 동안에도 나는 이 말의 뜻을 진심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전문의가 되어 내 이름을 달고 수술을 하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쇠약해진 몸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의료진에게 맡긴 환자들을 보면서, '환자를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의사에게 있어서는 소통을 통해 보다 정확한 진단을 가능하게 하고, 진심을 담아 그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할아버지의 세 가지의 조언 외에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신 또 하나의 가르침이 있다. 바로 '봉사하는 삶'이다.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가족들의 소식은 알고 있느냐?"라는 질문에 "내가 이곳에서 아프고 가난한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면 북한에서도 누군가가 내 식구들을 잘 돌봐 줄 거라고 나는 믿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서 겉으로는 표현을 안 하시지만 속으로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시다는 것을 알았다.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로서 많은 재물을 모아 후손에게 남겨주실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큰 가치를 내게 남겨주신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봉사를 하면 그것이 결국에는 나와 우리 가족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9년 전 서울 백병원의료진의 일원으로 우연히 참석한 캄보디아 의료 봉사를 계기로 지금까지 매년 의료 봉사를 다니고 있다. 부산 청십자의료보험협동조합에서 이름을 따 '블루크로스의료봉사단'을 조직하기에 이르렀고. 2010년부터는 단순히 약만 나누어 주는 의료 봉사에서 벗어나 갑상선암과 유방암을 전문적으로 수술할 수 있는 의료봉사팀을 구성, 캄보디아 프놈펜의 헤브론 병원에서 첫 수술 캠프를 열어 지금까지 약 120명의 갑상선암과 유방암 환자들에게 수술을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주었다. 일 년에 3곳의 해외의료봉사(2월 라오스, 7월 몽고, 10월 캄보디아)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을 보고, 동료들은 대학병원의 업무도 바쁜데 너무 무리하다 병나는 것 아니냐며 걱정을 하곤 한다. 그런데 스스로도 신기한 것이 봉사를 하면 오히려 피곤함이 사라진다. 내가 남에게 베풀면 그들이 행복한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더 행복해진다는 사실은 책에만 있는 얘기가 아니다.

비록 내가 소외된 이웃에게 내미는 손길은 작고 미미하겠지만, 할아버지가 하신 것처럼 이것이 나비효과와 같은 힘을 발휘해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배려, 돕고자하는 마음이 국가적, 사회적 전체의 관심사로 이어지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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