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임석준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군주 중의 한 명이다. 그녀는 18세에 왕위에 등극하여 무려 64년을 통치하였다. 그녀의 재위 기간은 '빅토리아 시대(The Victorian Era·1837∼1901)'로 통칭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제국의 전성기와 일치한다. 빅토리아의 이름은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짐바브웨와 잠비아 사이의 빅토리아 폭포, 그리고 수많은 지명과 건물명으로 남아 있다. 또한 남편 앨버트 공과의 화목한 가정에 대한 이미지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도덕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대영제국 전성기 연 빅토리아 여왕
통치하지 않아 유능한 군주 돼
근대기업 소유와 경영 분리
회사 경영 능력은 물려줄 수 없어
절대군주제와 유사한 한국 대기업
입헌군주제 철학 배워야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녀가 1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던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 후유증으로 경제공황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1832년 선거법 개정으로 중산층에 선거권이 주어지자, 소외 받은 노동자들도 선거권을 포함한 자신들의 권익이 관철되기를 요구하였다. 이를 차티스트 운동이라고 하는데, 빅토리아는 그런 민중들의 모습들을 보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사실 빅토리아 여왕은 입헌군주였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빅토리아가 입헌군주의 역할에 충실하여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reign but not rule)'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이다. 그녀는 왕으로서의 집무가 시작되자마자 매일 1시간 이상을 멜버른 수상을 만나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익혔고, 이후에도 디즈레일리, 글래드스턴, 파머스턴과 같은 뛰어난 수상, 즉 전문경영인에게 국정을 맡겼다. 역설적이지만, 빅토리아는 통치를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유능한 군주가 된 것이다.
입헌군주제는 왕의 권력이 헌법에 의하여 제한 받는 정치체제이다. 입헌군주제하에서 왕은 군주의 자리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으나, 국가의 경영권은 민주적 선거를 통해 권력을 획득한 총리에게 맡긴다.
솔직히 왕의 입장에서 법률에 구속 받지 않고 국민을 무제약적으로 통치하던 절대군주제에서 법에 의해 권력이 제약받는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은 매우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길이었을 것이다. '나의 말이 곧 법인 시대'에서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한 시대'로의 전환은 특권층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통해 특권의 일부를 내려놓은 왕족은 그 혈통을 유지하였다.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은 재산권과 경영권을 분리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왕가를 유지하고 있고, 그러지 않고 시대적 경향에 역행한 국왕들은 단두대에서 처형되거나(프랑스) 가족이 몰살당하기까지(러시아) 하였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의 경영학적 개념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이다. 재산권과 경영권의 분리는 근대적 정치체제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근대 기업의 특징이기도 하다. 국가나 기업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이유는 재산은 물려줄 수 있지만 재능은 물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훌륭한 군주의 자녀라고 성군이 되라는 법이 없는 것과 같이, 자기 집안에서 대대손손 인재가 나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최근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리턴'을 계기로 경영 능력을 검증받지 못한 재벌가 자제들의 '갑질'과 초고속 승진이 문제가 되고 있다. 평생 동안 직장에 충실해도 갈까 말까 하는 임원 자리를 이들은 3∼4년이면 쉽게 점령한다. 자식에게 재산뿐만 아니라 경영권까지 물려주는 한국식 경영체제는 국왕이 마음대로 통치하는 절대군주제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회사는 주식의 형태로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러나 회사를 경영하는 능력은 원하는 대로 물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초의 전문경영인으로 볼 수 있는 GM의 앨프레드 슬론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독재자가 다스리는 기업은 성공적인 조직으로 발전할 수 없다. 독재자가 모든 문제의 해답을 안다면 독재 제도가 가장 효율적인 경영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독재자는 지금까지 없었으며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대기업들도 오랫동안 성공하기 위해서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빅토리아의 입헌군주제 철학을 배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