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업의 부산에 살다] 개화승 이동인의 흔적이 밴 대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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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사 범종에 새겨진 일본식 문양과 명문.

중구 광복동의 대각사(大覺寺)는 초량왜관 시절(1678~1876) 서관(西館)의 3대청 중 중대청(참판옥)으로 일본의 임시사절단이 머무는 숙소로서 당시로서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었다.

개항 이듬해인 1877년 11월 일본 교토의 불교 진종대곡파 '동본원사'의 승려 오쿠무라 엔신과 미모의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가 부산포에 상륙하여 이 건물을 빌려 포교에 나서면서 절 이름을 '동본원사 부산별원'이라 했다.

동본원사의 오쿠무라 형제는 개화승(서울 봉원사 승려) 이동인(李東仁)의 일본 밀항(1879)을 도왔으며, 이동인이 일본의 동본원사에서 10개월간 체류하면서 메이지유신에 성공하여 변모한 일본의 발전상을 소상히 살피게 도와준다.

일본 동본원사 승려 오쿠무라
부산 포교 위해 현 '대각사' 빌려

개화승 이동인 교토로 밀항시켜
메이지유신 이후 변화상 가르쳐
박영호 김홍집 등에 생생히 전달

절 건물 국가 귀속, 전소 우여곡절
1970년에 새로이 한국사찰로 창건


청계천변 광통방의 대치 유홍기(大致 柳鴻基)를 만나면서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 된 중인 신분 승려 이동인의 이 정보는 광통방에 출입하는 박영효·김윤식·김옥균·홍영식·유길준·김홍집 등 북촌 양반 자제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1880년 고베를 출발하는 우편선을 타고 새로 개항한 원산항을 통해 귀국한 이동인은 민영익의 주선으로 고종을 배알하고 일본의 국정과 세계 각국의 형세를 상주하는 등 국제외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미국과의 수호조약체결을 위하여 미리 조약문 초안을 작성하기도 하였는데, 이후 1882년 1월 김윤식이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과 조약내용을 검토할 때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드디어 고종은 그해 12월 정부개편을 단행하고 1881년 2월 10일(양력 3월 9일) 이동인을 불러 일본으로 떠나는 신사유람단의 참모관으로 임명한다. 신사유람단은 일본 정부의 조직과 운영은 물론 특히 군사시설을 세세히 살펴오는 일종의 암행임무였다. 총 62명의 구성원 중에는 박정양·이상재·홍영식·유길준·윤치호 등이 있다. 최고령 이원회가 55세로 참획관을 맡았으며 대개가 40세 전후의 젊은이였는데, 최연소는 윤치호로 겨우 17세 소년이었으니 공들여 인선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출발 직전 이동인은 실종당하고 만다. 이는 암살이 분명해 보인다. 배불숭유의 나라인 조선왕조의 국왕이 일개 승려를 불러 국정을 자문하면서 조선의 개항과 근대화를 의논했다면 훈구세력의 반발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터. 그러므로 이동인은 그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른 살의 아까운 젊음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실로 불보다 더 뜨거웠던 열정의 세월 15년이 구름 속에 흩어져 버린 것이다.

이 과정은 1980년 영국 외무성에서 비공개 시효가 만료되어 공개한 외교문서 '사토페이퍼'와, 당시의 조선과 일본의 사정을 자세히 적은 오쿠무라 엔신의 '조선국 포교일지' 등이 공개되면서 알려진 것들이다. 동본원사 부산별원에는 '초량관어학소'를 두어 일본인이 우리말을 배우고 익혀 통역관을 양성하는 조선어학습소를 개설하기도 했다.

해방과 더불어 동본원사 부산별원은 일본 본원으로 철수한다. 절 건물은 한국 정부에 귀속되어 방치되다가 1953년 1월 30일 국제시장 대화재 때 전소되고 말았다. 1970년 동본원사를 귀속재산으로 처분할 때 이 땅을 경매받은 경남불교종무원에 의해서 새로이 한국사찰이 창건되어 '대각사'라 명명한다. 창건 때의 유물로는 대웅전 월대 위의 범종과 앞마당의 석등이 있다. 재단법인 화쟁교원으로 등록된 시민공찰이다.

옛 동원본사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대지 중앙에 대웅전을 조영하고 진신사리탑을 쌓았다. 절 입구에는 상업부지의 특색을 살려 점포를 배치한 후 대웅전 양쪽에 4, 5층 건물을 지어 좁은 터를 최대한 활용하기도 했다.


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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