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연중기획 '나눔' 1부 빈곤가정 컨설팅] 2. 외할머니와 사는 여고생 주연이
"제대로 씻고 학교 가고 싶어요… 꿈이오? 높게 말해도 돼요?"
17세, 외모에 한창 관심이 많을 나이이다. 주연(가명·여)이는 다른 친구들처럼 옷이나 화장품을 사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주연이가 바라는 것은 아침에 일어나 머리 감고 샤워를 한 깔끔한 모습으로 학교에 가는 것. 남들에게는 당연한 일상이다.
주연이는 해운대구에 있는 한 주택에서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화장실이 집 바깥에 있는 불편함은 둘째치고, 외벽이 무너지고 내려앉아 위생 관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변기 옆에 있는 수도꼭지로 '고양이 세수'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샤워는 꿈도 꿀 수 없다. 하지만 이건 대수롭지 않다. 샤워조차 할 수 없는 이 집에서 언제 쫓겨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 사는 집은 외할머니가 이혼하면서 위자료로 받았다. 외할머니는 이 집이 세워진 땅이 국유지란 것을 몰랐고, 10년 동안 토지세를 내지 않아 한국자산관리공사로부터 소송이 들어왔다. 결국, 주연이네는 밀린 토지세 1천900만 원 가운데 1천400만 원을 내라는 판결을 받았다. 세금 납부 유예 기간인 1년 이내에 밀린 세금을 내지 못하면 주연이와 외할머니는 퇴거해야 하는 상황이다.
씻을 덴 집 밖 수도꼭지 하나
국유지 집도 당장 쫓겨날 판
"회계사가 돼서
할머니께 효도하고 싶은데…
자격증 학원비 걱정이에요"
외할머니는 1천400만 원이라는 돈을 한 번에 내기 힘들어 조금씩 나눠서 내고 있지만,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특별한 수입 없이 정부보조금과 후원금만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전기세 등 각종 공과금과 생활비를 내기에도 빠듯하다. 이렇게 주연이네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외할머니는 주연이에게 크게 걱정하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외할머니는 "살다 보면 이렇게 힘들 때도 있는 거고, 남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은 나중에 주연이가 커서 그만큼 또 베풀어주면 되는 거니까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지 마라"고 주연이를 다독인다.
외할머니는 주연이가 세 살 때부터 맡아 길렀다. 주연이가 세 살 때, 술에 취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흉기로 수차례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고, 아버지는 교도소에 수감됐다. 어머니는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외상 후 트라우마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주연이를 외할머니께 떠맡기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버렸다.
이 일은 주연이에게도 트라우마를 남겼다. 부모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아야 하는 시기에 부모와 떨어져 지내게 되다 보니, 정서적 안정이 충족되지 못해 주연이는 성장 기간 타인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집착이나 분리불안 증세를 보였다.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 진단까지 받게 됐지만, 다행히 지속적인 약물치료와 외할머니의 관심으로 현재는 증상이 많이 완화됐다.
지금 주연이는 ADHD 문제를 겪은 아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밝고 낙천적이다.
주연이 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워준 것은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는 병원에서 13년 넘게 일하며 주연이를 보살폈다. 그러나 관절을 다치면서 병원 일을 그만두게 됐다. 식당 등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구해보려고도 했지만, 6년 전 고깃집에서 일하다가 쓰러진 이후로는 더 이상 일을 못 하게 됐다. 올해 73세인 외할머니는 당뇨로 인한 어지럼증을 비롯해 관절 등 몸이 여기저기 불편한 데다, 경제적인 부담감으로 마음마저도 편할 날이 없다.
이런 외할머니를 보는 주연이는 졸업 후 하루빨리 취업해서 자리를 잡아 외할머니에게 효도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 계획과 장래 희망을 묻는 말에 주연이는 "높은 목표를 이야기해도 되요?"라고 쑥스럽게 웃으면서 "○○대 경영학과에 진학해 회계사가 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목표가 생기자 주연이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학업우수상 등 상을 2개나 받으며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주연이의 모습에서는 ADHD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2학년 진학을 앞두게 되자, 주연이는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빨리 취업하려면 전산회계와 컴퓨터활용 등 관련 자격증을 미리 따고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학원비와 시험 접수비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회계사가 될 수 있을까요?"
제대로 샤워도 못 하는 집에서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현실을 비관하기보다 저 멀리 앞을 내다보고 달려가는 주연이. 그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박진숙 기자 tru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