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봉사하랴 민원해결하랴… 인터뷰할 시간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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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로서 처음으로 통장이 된 원정옥(맨 오른쪽) 씨가 자택에서 이웃인 박승희(오른쪽에서 두 번째), 문태선(세 번째), 조재근(네 번째), 서영채(맨 왼쪽) 씨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강원태 기자 wkang@

"요즘 너무 바빠서 시간을 낼 수가 없어요."

대한민국 최초 새터민 출신 통장 원정옥(43·여) 씨는 바쁜 일정 때문에 인터뷰 요청을 한사코 거절했다. '삼고초려' 끝에 간신히 승낙을 얻어, 26일 오전 부산 사하구 다대동 38통, 원 통장의 집을 찾았다. 주민들이 모여 마을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이번 안건은 영구임대아파트 난방 문제. 원 통장이 난방대책을 꼼꼼히 설명하자 주민들은 "역시 원 통장이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2008년 남한 와 임대아파트 정착
해묵은 민원 해결하며 신뢰 얻어
4년 만에 당당히 통장까지 꿰차

이웃 새터민들과 봉사단 만들고
늦깎이 대학생 돼 복지학 공부
"사회적 기업 만들어 봉사 계속"


서영채(65·여) 38통 4반장은 "원 통장이 워낙 열심히 하다 보니 우리도 믿고 따르는 편이다"며 "해묵은 아파트 민원이 하나둘 해결된 것도 원 통장 덕분"이라고 추어올렸다.

■반대 주민을 우군으로 돌린 리더십

사실 원 통장이 2012년 6월 통장으로 처음 선출됐을 때부터 38통 주민들이 협조적인 것은 아니었다. 일부 주민들이 "한국 사정도 잘 모르는 탈북자가 어떻게 통장을 하느냐"며 반기를 들었다. 이에 원 통장은 행동으로 주민들을 설득하겠다고 다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한 이웃 주민에게 '치료의 길'을 열어 준 것.

당시 해당 주민은 새벽마다 집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이웃 주민들이 밤잠을 설치던 상황이었다. 결국 그를 아파트에서 내보내자는 여론이 비등하자, 원 통장이 직접 나서 구청, 보건소, 경찰서 등을 돌아다니며 해결책을 강구했다. 마지막으로 해당 주민의 보호자를 만나 치료 동의까지 받아 내면서 한밤중의 소동도 마무리가 됐다.

원 통장은 "예전에 반대하신 분들이 지금 가장 잘 도와주신다"면서 "주민들과 아파트 단지를 변화시킬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도움만 받는 새터민? 도움 주는 새터민!

원 통장은 2008년 2월에 남한으로 왔다. 북한 함경도에서 살던 중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이 찾아오자 중국을 오가며 장사를 시작했지만 당국에 적발돼, 아예 중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두 자녀의 미래를 위해 남한으로 왔다. 남편이 앞서 남한으로 와 정착했고, 두 자녀는 2년 뒤 남한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남한 사회 적응이 녹록지 않았다. 특히 돈 없고, 백 없고, 지식 없는 서러움을 톡톡히 느꼈다고 한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힘들다"는 말이 10번 이상 튀어나왔다. 그럴 때일수록 열심히 살 궁리를 했다. 그중의 하나가 봉사활동이다.

원 통장이 2012년 12월 조직한 '파랑새 봉사단' 소속 새터민 7명은 독거노인, 장애인에게 도시락과 밑반찬을 제공하고 있다. 통장직을 수행하면서 영구임대아파트의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게 된 게 봉사단을 조직한 동기이기도 하다.

원 통장은 "새터민들도 우리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면서 "주위의 부정적인 시선을 이런 마음가짐으로 극복했다"고 털어놨다.

■사회적기업 설립이 최종 꿈

원 통장의 12월 달력은 동그라미로 빼곡하다. 주민 모임, 봉사활동 그리고 대학 강의 일정 표시다. 현재 동주대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 중인 원 통장은 내년 2월 졸업을 앞두고 있다. 원 통장은 공부를 마친 뒤 사회적기업을 설립해 주민들을 고용하려는 당찬 포부도 가지고 있다. 사실 공무원 시험 공고가 날 때마다 주민센터에서 통장 혜택을 이유로 응시를 제안했지만, 원 통장은 단번에 거절했다.

그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 나 혼자 잘 사는 것으로 끝이기에 제안을 거절했다"면서 "주민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이 사회적기업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원 통장이 정책 담당자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기자를 다시 앉혔다. "소외계층 대책을 내놓을 때 제발 피부에 와 닿도록 해 주시고, 일자리 좀 많이 만들어 주세요." 그의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묻어났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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