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형의 부산기업 스토리] 19. 고려원양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 논설위원

고려원양은 5·16 쿠데타 때 혁명공약을 담은 유인물을 찍었던 광명인쇄소의 오너였던 이학수 회장이 창업한 회사다. 박정희 정부 출범 직후인 1963년 창업과 동시에 원양어선 10척을 발주하는 등 막강한 자본력을 과시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후 매년 10여 척씩 원양어선을 신규로 건조할 만큼 고도성장을 거듭한 고려원양은 창업 10년 만에 어선 143척을 보유한 업계 선두 주자로 나섰다. 당시 수산왕국을 자처하던 일본에 도전장을 내밀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그 배경을 두고 "고려원양이 정치권의 비호하에 수산진흥자금을 독식한다" 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었다.

그런 와중에도 고려원양은 3만t급 초대형 공모선(工母船)을 도입하는 등 탄탄한 성장세를 이어 갔다. 그 결과 1976년에는 원양어선 165척을 거느린 세계 최대 원양어업 회사로 등극하는 영광까지 누렸다.

창업 13년에 세계 최대 원양회사
정치엔 관여치 말라는 교훈 남겨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처럼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고려원양에도 1976년을 기점으로 불행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해 12월 4일 개각과 때를 같이하여 이 회장이 탈세 및 외환관리법위반 혐의 등으로 전격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를 놓고 정권 실세들 간에 벌어진 권력투쟁에 이 회장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풍설이 떠도는 등 온갖 억측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정확한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 과정 속에 이 회장은 서울 한남동 자택(현 유엔빌리지)을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매각할 정도로 극도의 내핍 경영을 이어가면서 10년에 걸친 법정 투쟁을 계속한 결과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집념을 보여 줬다. 박 대통령이 서거한 지 7주년이 되는 1986년 10월 26일에 받아낸 판결이었다.

이후 고려원양은 제2의 도약을 선언했지만 미국과 옛 소련 등이 어업 쿼터제를 실시하는 등 악재들이 줄을 이었다. 대형 화재사건 등 외우내환이 끊이지 않았던 고려원양은 이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만인 1992년 5월 결국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후 IMF사태까지 겹친 2000년 6월 최종 파산 선고를 받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장사꾼이 정치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이 회장의 유언을 간직하고서. junsh@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